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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집

2022-11-11

문화 문화놀이터


역사를 짓다
왕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집
'보물 의성 고운사 연수전'

    1744년 조선 제21대 왕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우리나이로 51세가 되었다. 51세는 60세를 바라보는 나이라고 해 경사로 여겼다. 그해 9월 영조는 광화문 남쪽 끝에 있던 기로소(耆老所)의 경우 영수각(靈壽閣)으로 나아갔다. 이로써 기로소에 이름을 올린 세번째 왕이 된 영조는 경상도 의성 고운사에 어첩(御帖)을 봉안한 건물을 짓도록 명했다. 

 
보물 의성 고운사 연수전(義城 孤雲寺 延壽殿) 전경 (사진.문화재청)


사찰 안에 지어진 조선 왕실의 기로소
    무병장수와 부귀는 모든 사람이 소망하는 바람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나이가 70세가 되고 벼슬이 정2품 이상인 사람을 기려 기로소에 모셨다. 임금은 그 기준을 60세로 낮추었다. 태조(太祖, 재위 1392~1398)는 1394년 60세가 되었을 때 기로소에 입소했고,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1719년 59세가 되자 해를 앞당겨 기로로 삼았다. 영조는 이를 더 앞당겨 망륙(望六) 즉, 60세를 바라보는 51세가 되자 기로소에 입소한 것이었다. 영수각 안에 모신 어첩(왕실 책자)에 ‘지행순덕영모의열왕(至行純德英謨毅烈王)’이라는 자신의 호를 직접 쓴 영조는 기로소 입소를 기뻐하며 기로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고 잔치를 열었다.
    이와 함께 경상도 의성 고운사에는 어첩을 봉안한 건물을 짓도록 했다. 왜 고운사가 선택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왕실과의 오랜 인연으로 짐작된다. 고운사의 ‘어첩봉안각(御帖奉安閣)’은 서울 기로소에 있던 영수각을 본떠 지었다고 전한다. 몇 해 뒤에는 건물 이름을 ‘기로소 봉안각’으로 고쳤다.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1902년 51세가 되었는데 선왕의 예를 따라 기로소에 들었다. 이를 기념하는 여러 사업 가운데 고운사 기로소 봉안각을 수리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영조 때 세운 건물을 수리하고 새롭게 단장해 건물 이름을 ‘연수전(延壽殿)’으로 고쳤다. 지금 고운사에 남아 있는 연수전은 다듬은 돌을 다섯 단 쌓아서 네모반듯한 기단을 갖추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중앙에 1칸의 방을 두고 사면에 개방된 툇간(退間)을 두른 독특한 형태이다. 사방에는 울타리를 두르고 솟을삼문으로 출입문을 삼아 격식을 최대한 올렸다.
    의성 고운사 연수전의 표본이 된 서울 기로소 영수각의 모습은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해서 그린 몇 점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가운데 1칸에 채색한 감실(龕室)을 두고 4면에 개방된 툇간을 둔 형식이다. 사방에 울타리를 두르고 솟을삼문을 세운 점도 같다. 이렇게 사방을 개방하고 한가운데 방을 두는 방식은 한국 목조건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굳이 유사한 사례를 찾는다면 담양 면앙정을 비롯한 선비들의 정자에서 볼 수 있지만 긴장감 있는 짜임새에서는 연수전에 훨씬 못 미친다. 

 
左) 「기사경희첩」, 「영수각친림도」 부분, 1744년 (사진.국립중앙박물관)      右)보물 의성 고운사 연수전 현판(사진. 문화재청)


불교 사원에서 장수와 복록을 구한 조선 왕실
    연수전의 내부 장식도 색다르다. 감실 실내는 무병장수와 복록(福祿)을 상징하는 각종 동물과 식물 문양으로 치장되어 있다. 내부 좌우 벽에는 해와 달을 가리키는 ‘일(日)’과 ‘월(月)’을 한 글자씩 써 넣었다. 일월은 왕권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건물이 국왕의 경사로운 일을 기념하는 곳임을 드러내고 있다. 천장에는 용, 봉황, 거북, 기린 등 신령한 네 마리의 동물을 지칭하는 글자가 있고 출입구 위에는 여섯 마리 학이 구름 사이를 노니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감실 외벽에도 화려하고도 생동감 있는 채색 그림과 상서로운 글귀가 가득하다. 오른편 상단에는 ‘용루만세(龍樓萬歲)’라는 글귀와 함께 ‘부귀가 바다와 같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는 축원문이, 왼편 상단에는 ‘봉각천추(鳳閣千秋)’라고 적고 ‘수명이 산처럼 길어 늙지 않기를 바란다’는 글이 각각 적혀 있다.
    연수전은 크지 않은 건물이고 감실은 불과 1칸의 작은 방이지만 안팎의 그림이나 글귀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장수와 복록을 축원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사찰 안에 서울 육조거리에 있는 관청인 기로소의 영수각을 본떠 집을 지은 점도 색다르지만 곳곳에 왕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각종 글과 그림을 가득 채운 점은 한층 더 이채롭다. 공식적으로는 불교와 거리를 둔 조선이지만 왕실은 장수와 복록을 바라며 사찰을 지원했다. 영조가 고운사에 어첩봉안각을 세우고 고종이 이를 수리해서 연수전으로 삼은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연수전은 조선시대 왕실과 불교 사원의 오랜 인연을 보여주는 색다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