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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전관예우

20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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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소설] 전관예우
'글. 박순철'

    오늘도 청주의 진산 우암산을 오르는 네 사람. 그들은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고 정년퇴직한, 매달 나오는 연금 가지고 생활하는 이른바 화백(화려한 백수)들이다. 우암산을 거쳐 산성까지 가기도 하고 약수터로 내려오는 때도 있다. 그중에는 간부 출신이 있어 그가 중심이 되고 나머지 셋은 같이 근무한 인연으로 정년퇴직 후에도 계속 만나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공직에서 퇴직한 사람 중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은 골프다, 해외여행이다 해서 가끔 남의 입질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는데 이들은 전혀 아니다. 코로나19로 인해 5인 이상 모임이 금지되고 외국 나들이가 까다로운 면도 있겠지만, 이들은 불필요한 지출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번 만나서 산행하니 집안의 내력은 물론이고 동선까지도 쉬 파악된다. 우암산을 가지 않는 나머지 날은 복지회관 평생학습프로그램에 등록하여 각자 취미생활을 해오고 있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게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은 그저 우암산 다녀와서 막걸리 한잔 마시는 게 유일한 낙이요 일과이기도 하다.
    여느 사람들 같으면 그렇게 자주 만나서 회식, 아니 점심을 먹으면 정기적으로 회비를 걷어서 사용하는 게 보통인데 이들은 돌아가며 점심값을 내고 있다. 점심 메뉴도 정해진 게 아니고 그날 분위기 봐가며, 어느 때는 칼국수로 때울 때도 있고, 삼겹살이나 얼큰한 해장국에 막걸리를 먹을 때도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위대한 전(前) 국장님의 그 날 기분에 따라 메뉴가 결정된다.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국장님 오늘 점심 뭐로 드실까요?”하고 의사 결정권을 전(前) 국장에게 묻는다. ‘오늘은 그 집에 가서 간단하게 칼국수나 먹지요.’하면 칼국수 집이고, ‘오늘은 땀을 많이 흘렸으니 영양보충 좀 해야 되지 않겠어요?’ 하면 삼겹살집이나 매운탕집이 낙점된다. 그러면 자신이 점심을 사는 날은 어떨까? 열에 아홉은 ‘오늘은 간단하게 칼국수나 먹고 일찍 헤어집시다’하는 식이고, 순번에 의거 사는 것이지만, 얻어먹는 측에서도 대부분 가격이 저렴한 곳으로 모시고 가려한다.
    아무리 한솥밥을 먹으며 근무하고 정년퇴직한 사이라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칼국수에 빈대떡 안주와 막걸리를 먹으면 기껏해야 4만여 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삼겹살이나 매운탕집으로 가면 배 가까이 되는 7~8만여 원이 나온다.



    황소가 밟아도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네 사람의 우정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제 돈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우리보다 연금도 더 많이 타잖아. 우리가 살 때는 무한정 퍼마시다가 자기가 사는 날은 칼국수에 막걸리 두 병, 그것도 많이 먹으면 해로우니, 알맞게 마시자는 말이나 말아야지.”
    “그렇게 염치없어서 염 국장이야. 달리 염 국장인 줄 알았어. 하하 하”
    “직장에서 노상 대접만 받아봐서 그런가봐!”
    “그러니 어쩌겠어, 전에 모시던 상관인데 우리가 이해해야지?”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요. 선배 또한 영원한 선배로 모시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우리나라 미풍양속을 뉘라서 뒤엎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아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경쟁만이 존재할 뿐이다.
    항상 삼일공원에서 만나 9시에 등산을 시작했는데 그날은 오전 9시 30분이 되어도 염 국장이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주 등산에도 같이 웃고 떠들며 우암산 정상을 찍고 명암방죽에 새로 생긴 곰탕집에서 진국을 먹으며 소주를 같이 마시고 헤어졌던 염 국장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갑석 씨가 전화를 걸었다.
    “국장님 지금 어디쯤 오십니까?”
    “미안해요. 전화한다는 것이 몸이 아파서 그만….”
    “어디 많이 아프신 것 같네요?”
    “내가 무서워서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김 형도 조심해요.”
    “아니, 그럼 코로나에 걸리셨단 말씀이세요?”
    “몸이 영 이상해서 보건소에 가봤더니 양성이라고 해서 지금 병원에 있어요.”
    청천벽력이었다. 건강에 관해서는 자신을 따라올 수 없다고 큰소리 땅땅 치던 염 국장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도 간신히 받고 있으니 일행들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윽고 보건소에 나와서 검사를 받으라는 연락이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바깥 활동을 하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정부의 방역수칙을 철저히 따랐습니다. 그리고 결코 노 마스크로 바깥나들이를 한 적은 없습니다.”
    “혹시 유흥업소에 출입한 적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선생님 말고 가족 중에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 다녀온 사실 있으신가요?”
    “아내와 둘이 살고 있으며, 아내도 크게 외출을 하지 않는 상황이니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건소 담당 직원의 집요한 질문에 짜증스럽긴 했지만, 묻는 대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우리 국장님은 누굴 만난 거야?”
    “그러게 말이야. 우리에겐 그토록 철저히 마스크를 쓰고 다니라고 하더니 본인은 정작 마스크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아니야?”
    “글쎄 좀 있으면 모두 밝혀지겠지. 그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세 사람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 그 이상이었다. 검사 결과 다행스럽게도 세 사람 모두 음성으로 판명되긴 했으나 불안하긴 여전했다.
    “불편하시겠지만, 감염 경로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바깥출입을 통제합니다. 반드시 우리의 지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당장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감염 경로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보건소에서 시키는 대로 두문불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야 했다. 



    “과장님! 아니, 국장님 아니세요.” 
    그날 오후 등산을 마치고 마신 반주 탓에 기분 좋게 시내버스에서 내린 염 국장 앞에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사람이 있었다. 잘 알아보지 못하는 듯 하자 마스크를 내리는데 보니 R이라는 사내였다.
    “오랜만이군. 그래 별일 없지?”
    “네, 모두가 국장님 덕분입니다.”
    “무슨 말을?”
    “국장님 오랜만에 뵈었는데 어디 가서 저녁 식사나 하시지요. 그러잖아도 한번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나 이젠 국장 아닐세.”
    “저에게는 영원한 국장님이십니다. 옛말에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고 했습니다. 전관예우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R은 염 국장의 속을 무던히도 썩이던 골칫덩어리였다. R이 근무하는 하급 기관에 감사를 나간 일이 있었는데 업자에게 속아 국고에 손실을 끼친 것을 적발했다. 변상시키고 R에게는 강제 퇴직을 시킬 만큼 중차대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R은 퇴직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공직을 마감해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생각 끝에 변상 조치와 함께 모두가 꺼리는 부서로 좌천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한 일이 있었는데 아마 그 일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들어간 횟집에서 회와 고량주를 권하는 데로 마시고…. 노래방으로 옮겨 도우미를 끌어안고 노래도 부른 것 같은데….’
    염 국장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날 R을 따라간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전관예우 같은 것 안 해 줘도 좋으니 모른 체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