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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균형
2023-11-22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균형
'글.박종희'
찢어진 바지 사이로 피가 줄줄 흘렀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친정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맥없이 걸어 다니던 참에 정신이 확 들었다. 넘어지면서 손바닥에 몸을 의지하는 바람에 양손이 모두 욱신거렸다. 잠깐 사이에 왼쪽 손목이 달걀만 하게 부어올랐다.
병원에 갔더니 왼쪽 손목은 뼈가 깨지고 오른쪽 손은 인대가 늘어났다고 했다. 왼쪽 손목에 깁스하고 오른손은 손목 보호대를 찼다. 왼손잡이인 나한테 깁스를 해주던 의사 선생님은 왼손에 깁스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라고 했다. 하루아침에 양손이 묶인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손을 다치고 난 뒤 내 일상은 엉망이 되었다. 사소한 일에도 삐거덕거리며 잡음을 일으키는 내 손을 볼 때마다 온몸에 균형을 잃고 어린아이가 된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언제인가부터 아버지의 숟가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막, 숟가락질을 배우는 아이처럼 조마조마했다.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퍼 올린 밥은 중간쯤에서 흩어져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흘려버려 반도 못 드시는 아버지한테 밥을 떠먹여 드리려고 하면 아버지는 당신이 드시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일요일이면 친정 부모님은 나란히 교회에 가셨다. 시골교회라 예배를 마치면 교회에서 점심을 먹는데 아버지는 부리나케 집으로 오셨다. 아버지가 점심을 안 드시고 나오니 자연스레 어머니도 그냥 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면서 준비하는 음식인데 교회에서 먹지 않고 귀찮게 밥상을 차리게 한다고 잔소리했다.
점심을 드시며 교인들 앞에서 손 떨면서 밥 먹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목구멍에 가시가 박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남편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하셨다.
사람의 몸에서 손만큼 장하고 기특한 것이 있을까. 인간의 삶은 대부분 손이 이루어낸다. 오른손을 많이 쓰는 사람들에 비교하면 나는 왼손잡이다. 나한테 왼손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또 다른 나다. 숟가락질과 글씨 쓰는 것을 빼고 웬만한 일은 왼손을 거친다.
습관이 무섭다고 50년이 넘도록 고정된 동작은 깁스한 왼손을 자주 들썩이게 했다. 옷을 입으며 단추를 잠글 때면 왼손이 선수를 쳤다. 머리를 감을 때나 세수할 때도 왼손의 동작이 빨랐다. 리모컨을 잡을 때나 누웠다가 등이 가려워도 왼손이 먼저 올라갔다. 운전대를 잡아도 왼손에 힘을 주어 통증이 심해졌다.
손이 떨리는 것은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첫 신호였나 보다. 손 떨림이 심해지면서 아버지의 삶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혈관에 피떡이 생겨 다리가 붓더니 걷는 것도 불편해졌다. 혈액순환이 안 되면서 심장이 나빠지고 신장도 투석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 몸에서 균형을 잃어가는 기관들이 수시로 통증을 호소하고 질병으로 나타났다. 아버지는 집에 있는 날보다 병원에 계시는 날이 더 많아졌다.
친정 부모님은 금실이 좋았다. 어머니는 딱딱한 병원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며 아버지 걱정에 나날이 야위어갔다. 눈만 뜨면 늘 아버지 머리맡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팔순인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당신 몸에 병균이 자라는 줄도 몰랐다.
어머니를 많이 의지했던 아버지는 한쪽 날갯죽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맥을 놓았다. 자식이 여럿이라도 어머니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까래처럼 든든하게 받들고 있던 어머니를 보낸 아버지는 중심을 잃고 허물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꼿꼿하고 단단하던 아버지의 눈 주위가 자주 붉어졌다. 거동이 어려워 누워있으니 등도 유연성을 잃었다. 뇌의 크기가 아기같이 작아진 아버지는 감기 같은 작은 질병에 걸려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자존심 강하고 강건하시던 아버지가 이렇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을까. 시든 꽃잎처럼 이울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이 힘겨웠다.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참, 쓸쓸하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육 남매에 손자들까지 스물다섯 명을 거느린 한 일가의 추장이었다.
남한테 피해 주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셨던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울 것 없이 자식들한테 다 쏟아주고 빈털터리가 되어 허허로워진 아버지한테 내가 크게 일조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석 달 만에 깁스 풀고 나서도 손쓰는 일이 자유롭지 못했다. 왼손을 다친 뒤 내 오른손이 바빠졌다. 덕분에 왼손은 지난하게 살아온 세월의 보상이라도 받듯 호강했다. 구정물에 손도 안 대고 화장실에 가도 할 일이 없었다.
손이 묶여 얼굴만 뵈고 오던 내가 조심스럽게 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렸다. 저무는 저녁처럼 욕심 없이 삶의 목록을 내려놓은 아버지를 옆으로 눕히고 베드에 목욕용 비닐을 깔았다. 환자복을 벗기고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머리를 감기고 말끔하게 면도까지 해드렸다.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깔끔한 성품이라 누구한테도 몸을 맡기지 않는 아버지가 시원하다고 한마디 하신다. 아직도 육 남매의 지문이 어지럽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등을 닦아드리는데 손끝에 닿는 느낌이 마른 나무껍질처럼 꺼칠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 일부러 여러 번 문질렀다. 내 속을 알아채기라도 하신 걸까. 아버지는 “이제, 됐다. 고맙다. 고마워, 덕분에 아주 개운하다.”라고 하신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균형이 깨지면 몸 전체가 기운다. 무엇이든 적당히 조화를 이루어야 탈이 없다. 균형이 깨지면 삶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일에 목맬 때가 잦았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순조로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늘 붙어있어 하찮게 여기던 손의 소중함을 깨달은 요즘 나는 양손을 적당히 부린다. 어느 한 손도 서운하지 않도록 손의 마음을 읽으려 애쓴다. 원래부터 나는 왼손잡이였다는 쓸데없는 고집도 버렸다. 그러고 보면 왼손을 깁스하게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던 것 같다. 형평에 어긋날 정도로 왼손을 쓰는 내 몸이 균형을 맞추라고 내게 시련을 주었던 것 같다.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흔들리던 아버지는 마침내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으셨다. 아버지한테 가는 길에 얼굴에 와 닿는 칼바람이 매섭다.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는데 내게 마스크를 씌워주던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이 생각나 코끝이 시큰거린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그리워할 것 같다. 생전에 턱없이 아버지 쪽으로 기울던 양팔 저울이 조금이라도 수평을 이루도록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기억해야겠다. 저무는 해를 안고 이별 의식을 치르는 노을처럼 균형 잃고 휘청거리던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추억해야겠다.
병원에 갔더니 왼쪽 손목은 뼈가 깨지고 오른쪽 손은 인대가 늘어났다고 했다. 왼쪽 손목에 깁스하고 오른손은 손목 보호대를 찼다. 왼손잡이인 나한테 깁스를 해주던 의사 선생님은 왼손에 깁스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라고 했다. 하루아침에 양손이 묶인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손을 다치고 난 뒤 내 일상은 엉망이 되었다. 사소한 일에도 삐거덕거리며 잡음을 일으키는 내 손을 볼 때마다 온몸에 균형을 잃고 어린아이가 된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언제인가부터 아버지의 숟가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막, 숟가락질을 배우는 아이처럼 조마조마했다. 아버지가 숟가락으로 퍼 올린 밥은 중간쯤에서 흩어져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흘려버려 반도 못 드시는 아버지한테 밥을 떠먹여 드리려고 하면 아버지는 당신이 드시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일요일이면 친정 부모님은 나란히 교회에 가셨다. 시골교회라 예배를 마치면 교회에서 점심을 먹는데 아버지는 부리나케 집으로 오셨다. 아버지가 점심을 안 드시고 나오니 자연스레 어머니도 그냥 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면서 준비하는 음식인데 교회에서 먹지 않고 귀찮게 밥상을 차리게 한다고 잔소리했다.
점심을 드시며 교인들 앞에서 손 떨면서 밥 먹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목구멍에 가시가 박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남편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하셨다.
사람의 몸에서 손만큼 장하고 기특한 것이 있을까. 인간의 삶은 대부분 손이 이루어낸다. 오른손을 많이 쓰는 사람들에 비교하면 나는 왼손잡이다. 나한테 왼손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또 다른 나다. 숟가락질과 글씨 쓰는 것을 빼고 웬만한 일은 왼손을 거친다.
습관이 무섭다고 50년이 넘도록 고정된 동작은 깁스한 왼손을 자주 들썩이게 했다. 옷을 입으며 단추를 잠글 때면 왼손이 선수를 쳤다. 머리를 감을 때나 세수할 때도 왼손의 동작이 빨랐다. 리모컨을 잡을 때나 누웠다가 등이 가려워도 왼손이 먼저 올라갔다. 운전대를 잡아도 왼손에 힘을 주어 통증이 심해졌다.
손이 떨리는 것은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첫 신호였나 보다. 손 떨림이 심해지면서 아버지의 삶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혈관에 피떡이 생겨 다리가 붓더니 걷는 것도 불편해졌다. 혈액순환이 안 되면서 심장이 나빠지고 신장도 투석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 몸에서 균형을 잃어가는 기관들이 수시로 통증을 호소하고 질병으로 나타났다. 아버지는 집에 있는 날보다 병원에 계시는 날이 더 많아졌다.
친정 부모님은 금실이 좋았다. 어머니는 딱딱한 병원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며 아버지 걱정에 나날이 야위어갔다. 눈만 뜨면 늘 아버지 머리맡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팔순인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당신 몸에 병균이 자라는 줄도 몰랐다.
어머니를 많이 의지했던 아버지는 한쪽 날갯죽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맥을 놓았다. 자식이 여럿이라도 어머니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까래처럼 든든하게 받들고 있던 어머니를 보낸 아버지는 중심을 잃고 허물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꼿꼿하고 단단하던 아버지의 눈 주위가 자주 붉어졌다. 거동이 어려워 누워있으니 등도 유연성을 잃었다. 뇌의 크기가 아기같이 작아진 아버지는 감기 같은 작은 질병에 걸려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자존심 강하고 강건하시던 아버지가 이렇게 무너질 줄 누가 알았을까. 시든 꽃잎처럼 이울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이 힘겨웠다.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참, 쓸쓸하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육 남매에 손자들까지 스물다섯 명을 거느린 한 일가의 추장이었다.
남한테 피해 주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셨던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울 것 없이 자식들한테 다 쏟아주고 빈털터리가 되어 허허로워진 아버지한테 내가 크게 일조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석 달 만에 깁스 풀고 나서도 손쓰는 일이 자유롭지 못했다. 왼손을 다친 뒤 내 오른손이 바빠졌다. 덕분에 왼손은 지난하게 살아온 세월의 보상이라도 받듯 호강했다. 구정물에 손도 안 대고 화장실에 가도 할 일이 없었다.
손이 묶여 얼굴만 뵈고 오던 내가 조심스럽게 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렸다. 저무는 저녁처럼 욕심 없이 삶의 목록을 내려놓은 아버지를 옆으로 눕히고 베드에 목욕용 비닐을 깔았다. 환자복을 벗기고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머리를 감기고 말끔하게 면도까지 해드렸다.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깔끔한 성품이라 누구한테도 몸을 맡기지 않는 아버지가 시원하다고 한마디 하신다. 아직도 육 남매의 지문이 어지럽게 남아 있는 아버지의 등을 닦아드리는데 손끝에 닿는 느낌이 마른 나무껍질처럼 꺼칠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 일부러 여러 번 문질렀다. 내 속을 알아채기라도 하신 걸까. 아버지는 “이제, 됐다. 고맙다. 고마워, 덕분에 아주 개운하다.”라고 하신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균형이 깨지면 몸 전체가 기운다. 무엇이든 적당히 조화를 이루어야 탈이 없다. 균형이 깨지면 삶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일에 목맬 때가 잦았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순조로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늘 붙어있어 하찮게 여기던 손의 소중함을 깨달은 요즘 나는 양손을 적당히 부린다. 어느 한 손도 서운하지 않도록 손의 마음을 읽으려 애쓴다. 원래부터 나는 왼손잡이였다는 쓸데없는 고집도 버렸다. 그러고 보면 왼손을 깁스하게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던 것 같다. 형평에 어긋날 정도로 왼손을 쓰는 내 몸이 균형을 맞추라고 내게 시련을 주었던 것 같다.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흔들리던 아버지는 마침내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으셨다. 아버지한테 가는 길에 얼굴에 와 닿는 칼바람이 매섭다.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는데 내게 마스크를 씌워주던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이 생각나 코끝이 시큰거린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그리워할 것 같다. 생전에 턱없이 아버지 쪽으로 기울던 양팔 저울이 조금이라도 수평을 이루도록 내가 아버지를 더 많이 기억해야겠다. 저무는 해를 안고 이별 의식을 치르는 노을처럼 균형 잃고 휘청거리던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추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