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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3부
2024-09-19
문화 문화놀이터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3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3-3.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청주읍성의 중앙에 해당되는 지금의 중앙공원 자리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약칭 충청병영)이 있었다. 충청병영은 충청도의 육군을 총지휘하던 곳이기 때문에 청주목 관아보다도 중심적 위치에 있었으며 규모도 컸다. 물론 종2품인 병마절도사의 계급도 목사보다는 한 단계 높았다. 「청주읍성도」에는 병영 내에 청진당(淸塵堂) 등 30여 건물의 위치와 명칭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폐문루(閉門樓)는 병영의 출입문으로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2층 문루이며, 그 명칭은 정곡루(正鵠樓)였으므로 2014년 해체보수를 하면서 편액을 새로 만들어 걸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이후 오랫동안 청녕각(淸寧閣)으로 오해되었다가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영문이었던 것으로 바로 잡혔다. 1976년에 ‘청녕각’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는데, 당시 이 건물 처마에 ‘청녕각’이라 새긴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 편액이 여기에 걸려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충청병영 내의 2층 누각으로 보았던 것이다.
1961년에 조건상 선생이 편찬한 『청주지』를 비롯하여 이후의 모든 책자와 홍보물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중앙공원 건물을 청녕각으로 기술하였다. 1982년에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문화재지』에도 이 건물을 관아가 아닌 누정 편에서 소개하였으며, 심지어 어떤 책에는 병영에 딸린 이 누정에 기생들을 불러 연회를 하였던 장소라 왜곡하기도 하였다. 1985년에 간행한 『청주근세60년사화』에는 한 걸음 더 나가 ‘조선시대의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흥미 있는 것이 누각과 정자이며, 그 특유의 기능과 입지조건에 따르는 조화미(調和美)는 매우 흥미를 끄는 건축물이 아닐 수 없다. 누정은 대개 경관이 수려한 장소를 택하여 유흥과 상경(賞景)의 기능을 하였지만, 이 청녕각은 관아에 소속되어 관민의 연회장 또는 접객의 장소로서 활용되어 정치적 목적이 농후하였던 만큼 정자보다 규모도 크고 층루(層樓)로 된 건물이라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이 고장의 누각으로는 고려시대의 망선루(望仙樓)와 조선시대의 청녕각만이 남아있어 매우 소중한 건물이다.’라고 쓰여 있다. 병영의 문루로서 침투하는 외적을 방어하거나 또는 병영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건물의 용도를 관민의 연회장 또는 접객의 장소로 활용된 정치적 목적이 농후한 층루라고 설명하고 있어 좀 지나치다 싶다.
이렇게 오랫동안 ‘청녕각’으로 잘못 알려지고 연회의 장소로 왜곡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청주동헌의 본래 명칭은 근민헌(近民軒)으로 1868년(고종 5)에 청주목사 이덕수(李德秀)가 이를 중건하고 ‘청녕각’이라 개칭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편액이 엉뚱하게도 옛 충청병영지인 중앙공원에 현존하는 2층 문루에 옮겨진 것이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청주동헌과 충청병영의 많은 건물이 헐리거나 민간에 매각되어 이전되는 등 혼란을 겪던 와중에 어떤 이유에 의해서인지 동헌의 편액을 떼어 놓았다가 엉뚱하게도 병영의 문루에 잘못 걸지 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다. 청녕각 편액의 의미나 역사성을 모른 채 단지 편액의 글씨가 멋있어서 공원의 잘 보이는 건물에 걸었다면 그 또한 엄청난 착오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나는 뒤늦게 이러한 오류를 알고 1988년 5월 7일에 의견서를 충청북도 문화재계에 제출하여 잘못된 문화재 명칭을 바로잡아 줄 것을 청원하였고, 이와 관련된 내용이 충청일보 1988년 5월 2일에 처음 보도된 후 4일, 10일자에도 연속 보도되었다. 주된 내용은 중앙공원에 있는 2층 누정은 청녕각이 아니라 충청병영의 정문에 설치된 문루이며, 청녕각은 청주동헌의 명칭으로서 당시 청원군청 내에 현존하는 동헌이라는 것이었다. 이 보도가 나간 후 지역의 원로 한학자인 신모씨가 장문의 글을 신문에 실어 나의 의견에 반박하는 등 논란이 있었으나, 1988년 9월 15일에 열린 충청북도 문화재위원회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되어 심의한 결과 나의 의견서가 그대로 인정되었다. 즉 충청병영문과 청녕각은 각각 별개의 건물로서, 청녕각이라 불리던 중앙공원의 2층 문루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으로 의결되었고, 청녕각은 청원군청 내의 동헌에 걸렸던 편액이므로 본래의 건물에 옮겨 부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충청병영의 문루 명칭을 바로잡게 되었고, 청녕각의 편액은 본래대로 청주동헌 정면 처마에 환원되었다. 충청일보는 이 사실을 11월 11일에 기사로 썼다.
청녕각 편액이 잘못 걸려 있는 사실을 처음 알려준 사람은 당시 청주대학교 강사였던 이상주 선생이었다. 그는 서문당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의 청주 편에 있는 1910년대의 청녕각 사진이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다며 본인이 『충청문예』1987년 6월호에 「현존 청녕각의 진위에 관한 연구-현존 청녕각은 통군루(統軍樓)이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보여주었다. 부제에서 보듯이 이상주 선생은 청녕각 편액이 잘못 부착되어 있던 2층 문루를 충청병영 내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오는 통군루로 추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 누정과 문루는 구조에서 차이가 있고 각종 문헌기록과 고지도를 비교하여 검토해보니 이상주 선생이 추정하는 통군루가 아니라 충청병영의 정문이었던 문루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10년대 사진 속의 청녕각은 단층의 목조기와집으로 정면이 7칸 정도로 보였고, 그 앞에는 삼문(三門)과 양옆으로 연결된 기와지붕의 토담이 있었다. 이는 정면 3칸 측면 2칸인 중앙공원 내의 현존 문루와는 판이하게 다른 건물이었다. 따라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청녕각의 편액이 본래의 위치와는 다른 건물에 걸려있었던 것이 확실하였다. 여기서 풀어야 할 과제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청녕각 편액이 잘못 걸려 있어 문화재 지정명칭조차 청녕각이 된 중앙공원 건물의 정체를 밝히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그럼 청녕각 편액의 원래 위치는 어디인지 밝히는 문제였다.
전술하였듯이 문제는 문헌기록을 통해 쉽고 명확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청주동헌을 해체수리하면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56년(효종 7)에 목사 심황(沈榥)이 창건하고 1732년(영조 8)에 현감 이병정(李秉鼎)이 중수한 사실이 있다. 이후 1825년(순조 25)에는 목사 이덕수가 10칸 규모였던 동헌을 28칸으로 크게 확장하여 새로 지으면서 편액을 근민헌에서 청녕각으로 바꾸었다는 내용을 적은 상량문이 『호서읍지』등에 수록되어 있다. 즉 근민헌의 바뀐 이름이 청녕각이고 청녕각은 곧 동헌이었던 것이다. 청주동헌에 걸려 있어야 할 청녕각 편액이 일제강점기에 중앙공원 건물에 옮겨진 것이 분명하다. 그 시기를 일제강점기로 보는 이유는 처음 청녕각이 왜곡된 사실이 밝혀지고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반론을 쓴 원로 한학자가 본인이 평생을 청주에 살면서 일제강점기 때부터 중앙공원에서 청녕각을 보았다는 글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1961년에 간행된 『청주지』에도 중앙공원에 있는 건물을 청녕각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대략 일제강점기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4부에서 계속>
Cheapter3-3.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청주읍성의 중앙에 해당되는 지금의 중앙공원 자리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약칭 충청병영)이 있었다. 충청병영은 충청도의 육군을 총지휘하던 곳이기 때문에 청주목 관아보다도 중심적 위치에 있었으며 규모도 컸다. 물론 종2품인 병마절도사의 계급도 목사보다는 한 단계 높았다. 「청주읍성도」에는 병영 내에 청진당(淸塵堂) 등 30여 건물의 위치와 명칭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폐문루(閉門樓)는 병영의 출입문으로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2층 문루이며, 그 명칭은 정곡루(正鵠樓)였으므로 2014년 해체보수를 하면서 편액을 새로 만들어 걸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이후 오랫동안 청녕각(淸寧閣)으로 오해되었다가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영문이었던 것으로 바로 잡혔다. 1976년에 ‘청녕각’이라는 명칭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는데, 당시 이 건물 처마에 ‘청녕각’이라 새긴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 편액이 여기에 걸려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충청병영 내의 2층 누각으로 보았던 것이다.
1961년에 조건상 선생이 편찬한 『청주지』를 비롯하여 이후의 모든 책자와 홍보물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중앙공원 건물을 청녕각으로 기술하였다. 1982년에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문화재지』에도 이 건물을 관아가 아닌 누정 편에서 소개하였으며, 심지어 어떤 책에는 병영에 딸린 이 누정에 기생들을 불러 연회를 하였던 장소라 왜곡하기도 하였다. 1985년에 간행한 『청주근세60년사화』에는 한 걸음 더 나가 ‘조선시대의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흥미 있는 것이 누각과 정자이며, 그 특유의 기능과 입지조건에 따르는 조화미(調和美)는 매우 흥미를 끄는 건축물이 아닐 수 없다. 누정은 대개 경관이 수려한 장소를 택하여 유흥과 상경(賞景)의 기능을 하였지만, 이 청녕각은 관아에 소속되어 관민의 연회장 또는 접객의 장소로서 활용되어 정치적 목적이 농후하였던 만큼 정자보다 규모도 크고 층루(層樓)로 된 건물이라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이 고장의 누각으로는 고려시대의 망선루(望仙樓)와 조선시대의 청녕각만이 남아있어 매우 소중한 건물이다.’라고 쓰여 있다. 병영의 문루로서 침투하는 외적을 방어하거나 또는 병영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건물의 용도를 관민의 연회장 또는 접객의 장소로 활용된 정치적 목적이 농후한 층루라고 설명하고 있어 좀 지나치다 싶다.
이렇게 오랫동안 ‘청녕각’으로 잘못 알려지고 연회의 장소로 왜곡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청주동헌의 본래 명칭은 근민헌(近民軒)으로 1868년(고종 5)에 청주목사 이덕수(李德秀)가 이를 중건하고 ‘청녕각’이라 개칭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편액이 엉뚱하게도 옛 충청병영지인 중앙공원에 현존하는 2층 문루에 옮겨진 것이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청주동헌과 충청병영의 많은 건물이 헐리거나 민간에 매각되어 이전되는 등 혼란을 겪던 와중에 어떤 이유에 의해서인지 동헌의 편액을 떼어 놓았다가 엉뚱하게도 병영의 문루에 잘못 걸지 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다. 청녕각 편액의 의미나 역사성을 모른 채 단지 편액의 글씨가 멋있어서 공원의 잘 보이는 건물에 걸었다면 그 또한 엄청난 착오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나는 뒤늦게 이러한 오류를 알고 1988년 5월 7일에 의견서를 충청북도 문화재계에 제출하여 잘못된 문화재 명칭을 바로잡아 줄 것을 청원하였고, 이와 관련된 내용이 충청일보 1988년 5월 2일에 처음 보도된 후 4일, 10일자에도 연속 보도되었다. 주된 내용은 중앙공원에 있는 2층 누정은 청녕각이 아니라 충청병영의 정문에 설치된 문루이며, 청녕각은 청주동헌의 명칭으로서 당시 청원군청 내에 현존하는 동헌이라는 것이었다. 이 보도가 나간 후 지역의 원로 한학자인 신모씨가 장문의 글을 신문에 실어 나의 의견에 반박하는 등 논란이 있었으나, 1988년 9월 15일에 열린 충청북도 문화재위원회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되어 심의한 결과 나의 의견서가 그대로 인정되었다. 즉 충청병영문과 청녕각은 각각 별개의 건물로서, 청녕각이라 불리던 중앙공원의 2층 문루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으로 의결되었고, 청녕각은 청원군청 내의 동헌에 걸렸던 편액이므로 본래의 건물에 옮겨 부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충청병영의 문루 명칭을 바로잡게 되었고, 청녕각의 편액은 본래대로 청주동헌 정면 처마에 환원되었다. 충청일보는 이 사실을 11월 11일에 기사로 썼다.
청녕각 편액이 잘못 걸려 있는 사실을 처음 알려준 사람은 당시 청주대학교 강사였던 이상주 선생이었다. 그는 서문당에서 발행한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의 청주 편에 있는 1910년대의 청녕각 사진이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다며 본인이 『충청문예』1987년 6월호에 「현존 청녕각의 진위에 관한 연구-현존 청녕각은 통군루(統軍樓)이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보여주었다. 부제에서 보듯이 이상주 선생은 청녕각 편액이 잘못 부착되어 있던 2층 문루를 충청병영 내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오는 통군루로 추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 누정과 문루는 구조에서 차이가 있고 각종 문헌기록과 고지도를 비교하여 검토해보니 이상주 선생이 추정하는 통군루가 아니라 충청병영의 정문이었던 문루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10년대 사진 속의 청녕각은 단층의 목조기와집으로 정면이 7칸 정도로 보였고, 그 앞에는 삼문(三門)과 양옆으로 연결된 기와지붕의 토담이 있었다. 이는 정면 3칸 측면 2칸인 중앙공원 내의 현존 문루와는 판이하게 다른 건물이었다. 따라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청녕각의 편액이 본래의 위치와는 다른 건물에 걸려있었던 것이 확실하였다. 여기서 풀어야 할 과제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청녕각 편액이 잘못 걸려 있어 문화재 지정명칭조차 청녕각이 된 중앙공원 건물의 정체를 밝히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그럼 청녕각 편액의 원래 위치는 어디인지 밝히는 문제였다.
전술하였듯이 문제는 문헌기록을 통해 쉽고 명확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청주동헌을 해체수리하면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56년(효종 7)에 목사 심황(沈榥)이 창건하고 1732년(영조 8)에 현감 이병정(李秉鼎)이 중수한 사실이 있다. 이후 1825년(순조 25)에는 목사 이덕수가 10칸 규모였던 동헌을 28칸으로 크게 확장하여 새로 지으면서 편액을 근민헌에서 청녕각으로 바꾸었다는 내용을 적은 상량문이 『호서읍지』등에 수록되어 있다. 즉 근민헌의 바뀐 이름이 청녕각이고 청녕각은 곧 동헌이었던 것이다. 청주동헌에 걸려 있어야 할 청녕각 편액이 일제강점기에 중앙공원 건물에 옮겨진 것이 분명하다. 그 시기를 일제강점기로 보는 이유는 처음 청녕각이 왜곡된 사실이 밝혀지고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반론을 쓴 원로 한학자가 본인이 평생을 청주에 살면서 일제강점기 때부터 중앙공원에서 청녕각을 보았다는 글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1961년에 간행된 『청주지』에도 중앙공원에 있는 건물을 청녕각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대략 일제강점기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4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