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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공장 굴뚝에 연기 대신 문화 향기가 보고 놀고 먹고 하루가 부족해!

2024-07-26

라이프가이드 여행


「로컬100」따라가기
담배 공장 굴뚝에 연기 대신 문화 향기가 보고 놀고 먹고 하루가 부족해!
'청주 문화제조창'

    고백하자면 여행을 위해 충북 청주를 찾은 적은 없었다. 유서 깊은 도시라는 것엔 동의하나 굳이 발걸음을 할 만큼의 인력(引力)이 작용하는 도시는 아니었기에. 그래서일까. 청주는 한동안 대전과 함께 ‘노잼 도시’란 오명을 벗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흉물로 취급받던 담배 공장 ‘연초제조창’ 건물이 대대적 수술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와 ‘문화제조창’, ‘동부창고’ 등으로 변신하면서 청주는 ‘꿀잼 도시’로 떠올랐다. 로컬100(지역문화매력 100선)에 선정된 청주 문화제조창을 찾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맞은편 연초제조창 사무동 건물의 낡은 담벼락엔 담뱃갑 그림이 남아 있다. (사진. 박근희 객원기자)

연초제조창이 문화제조창으로
    “규모만 14만㎡(4만 2000여 평)에 이르는 거대한 담배 공장 단지였습니다. 근현대 산업의 중심이기도 했고요. 입구 건너편, 지금은 빌딩이 들어선 일대까지 담배 공장 부지였다고 하니 당시엔 지금보다 더 어마어마한 규모였겠죠?”
    초록 잔디가 융단처럼 깔린 문화제조창 중앙광장 한가운데서 이원미 청주시 문화관광해설사가 해설을 시작했다. 눈앞으로 ‘C 문화제조창 본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라고 쓰인 건물 두 동과 빛바랜 담뱃갑 벽화가 그려진 낡은 건물이 이어졌다. 여기에 미술관 뒤편 담뱃잎 보관 창고로 쓰였다던 ‘동부창고’까지 둘러보려니 마음이 급해졌다. “해설 시간만 최소 40분에서 최대 120분 정도 걸립니다. 워낙 넓으니 구석구석 보려면 관람 동선을 잘 짜야 합니다.” 이 해설사의 말에 운동화 끈부터 조여 맸다.
    문화제조창의 전신은 1946년 설립된 경성전매국 청주 연초제조창이다. 연초는 담배의 주재료로 쓰이는 잎이다. 담배 자체를 연초라 부르기도 한다. 청주 연초제조창은 한때 3000여 명의 근로자가 매년 100억 개비 이상의 담배를 생산하고 17개국으로 수출하는 등 근현대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곳이다. 50대 이상에게 유명한 ‘솔’, ‘장미’, ‘라일락’ 등의 담배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근현대 산업 유산들이 그렇듯 이곳 역시 기계화·첨단 산업화라는 시대의 파고를 비껴갈 순 없었다. 금연을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담배 소비까지 급감하면서 연초제조창도 서서히 폐쇄 수순을 밟게 됐다.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사라지고 인적마저 끊겨 원도심의 흉물처럼 방치돼오기를 수년, 가동을 멈춘 공장은 2011년 다시 호흡을 시작했다. 담배 공장이 아닌 청주공예비엔날레 전시장으로 역할을 달리하면서다. 당시 세계적 흐름이었던 폐공장을 문화예술 아지트로 변신시키는 ‘아트팩토리’ 붐에 도시 재생 바람이 더해지면서 연초제조창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후 2017년 청주시가 매입한 낡은 공장 지대는 대대적인 변신에 들어갔다. 리모델링을 한 건물에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가 들어오고 본관동인 연초제조창은 문화제조창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담뱃잎 보관 창고는 시민문화와 예술교육 등을 아우르는 동부창고로 ‘환생’했다. 

 
문화제조창 본관 5층의 열린도서관. 누구나 자유롭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도 되는 공간이다. (사진. C영상미디어)


 
공예전시장·도서관·식당가 한자리에
    문화제조창 본관은 연초제조창의 흔적을 숨은그림찾기 하듯 살펴보기 좋은 곳이다. ‘원더아리아’라 이름 붙인 1층 한쪽엔 유리 바닥 아래 연초제조창 시절의 공장 바닥을 그대로 살려놨다. 공장에서 쓰던 철문, 화물용 엘리베이터와 소화전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담배를 만들던 공장엔 현대식 쇼핑몰, 식당, 감각적인 카페 등과 청주시청 제2청사, 한국공예관, 청주열린도서관과 키즈카페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연초제조창의 내력을 좀 더 살펴보고 싶다면 3층 ‘연초제조창 아카이브 특별전’으로 향해야 한다. 해방 기념으로 우리 손으로 만든 첫 담배 ‘승리’부터 다양한 디자인의 시대별 담뱃갑이 눈길을 끈다. 1940~1980년대 공장 풍경을 담은 사진과 자료를 보다 보면 흥미로운 점도 발견하게 된다. 담배 소비층은 주로 남성이었지만 담뱃잎을 만지던 노동자는 모두 여성이었다는 것을 전시된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 지금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 된 연초제조창의 여성 근로자 영상도 뭉근한 감동을 준다. 이밖에 레트로한 그림과 글자의 담뱃갑, 공장에서 쓰였던 손때 묻은 물건들이 아련한 추억을 불러낸다. 공예전시관 갤러리3에선 ‘공예의 숲’ 전시(~6월 2일)가 한창이다.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해온 나무를 주제로 각자장 박영덕 장인과 죽세공예 명인 서신정 작가 등 12명의 작가가 재해석한 나무 작품 51점을 만나볼 수 있다. 5층에는 열린도서관이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소리 내어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분위기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책의 향기가 공존하는 곳이다. 

 
국내 최초 ‘수장형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의 1층 개방 수장고에선 우리나라 대표 조각가 전뢰진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묵직한 존재감,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청주여행자센터를 출발점으로 삼는 대신 주차장으로 빠져나오면 동부창고나 원통형의 높다란 굴뚝을 만나게 된다. 설치미술 작품처럼 우뚝 선 30여m의 굴뚝도 이곳이 과거 담배를 만들어내는 공장이었음을 알려주는 유서 깊은 상징물이다. 이 굴뚝을 꼭짓점 삼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와 문화제조창, 두 개의 건물이 연결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작품의 보관과 보존에 특화된 국내 최초의 ‘수장형 미술관’이다. 수장고와 보존과학실을 일반에 개방해 색다른 관람을 즐길 수 있다. 1층 로비에서 무료 입장권을 받아 맨 위층부터 한 층씩 관람하며 내려오는 동선으로 돼 있다. 관람 인원을 제한해 한정 개방하는 4층 특별수장고의 ‘드로잉 소장품’ 전시가 인기지만 4월 26일부터 8월 25일까지는 임시 휴관이다. 대신 5층에선 새로운 전시를 준비 중이다.
    2층 ‘보이는 수장고’는 유리창을 통해 수장고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꾸몄다. 6월 30일까지 ‘보이는 수장고: MMCA 이건희 컬렉션 해외 명작전’을 연다. 2021년 4월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MMCA 이건희 컬렉션’ 중 서양 현대미술사의 흐름을 주도한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폴 고갱,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호안 미로 등 거장의 작품 7점을 선보인다. 관람객들은 라운지처럼 꾸민 소파에 편히 기대 수장고를 마주하고 명작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초록의 중앙광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1층 개방 수장고에선 우리나라 대표 조각가 전뢰진의 조각 10점, 드로잉 7점을 볼 수 있다. 가족과 사랑, 낙원 등 따스함이 깃든 작품을 보다 보면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듯하다. 
예술가의 아지트, 시민들의 놀이터
    미술관 뒤편 동부창고에는 카페와 공방, 지역 커뮤니티 시설이 입주해 있다. 담뱃잎 보관 용도로 쓰인 창고 중 7개 동이 남아 있는데 적벽돌과 목조 트러스 구조의 지붕 등 1960년대 공장 창고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존가치가 높다. 벽면엔 그라피티(길거리 그림)가 그려져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덕분에 젊은 층 사이에 사진 명소로 꼽힌다.
    동부창고 6·8동과 야외광장은 전시, 공연, 마켓, 체험 등을 여는 이벤트의 장이다. 시민들이 편히 이용하는 ‘카페C’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부창고의 플랫폼 역할을 하는 곳이다. 34·35·36동은 예술가와 동아리 및 시민들이 공연 연습 등을 하는 문화예술 거점 공간으로, 37·38동은 예술가와 함께하는 예술 교육 및 창의적 예술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동부창고 일부 구역은 5월 10~12일 열리는 ‘2024 가드닝 페스티벌-모두의 정원’ 조성과 연출을 위한 공사가 5월 초까지 진행될 예정이어서 다소 어수선할 수 있으니 알고 가는 게 좋겠다. 가드닝 페스티벌 기간엔 원예체험을 비롯해 버스킹, 밴드 공연, 푸드트럭 등이 더해진다고. 시끌벅적한 풍경을 기대하며 문화제조창을 나서는 길, 어느새 운동화 끈은 느슨해져 있고 해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전시부터 독서, 쇼핑, 식사까지 문화제조창에서 꽉 채운 하루가 속삭였다. 쉴 새 없이 문화를 만들어내는 문화제조창이 있는 한 청주는 더 이상 노잼일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