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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범종이 출토된 운천동 절터 3부

2024-07-18

문화 문화놀이터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신라 범종이 출토된 운천동 절터 3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1-3. 신라 범종이 출토된 운천동 절터

운천동사지와 주변 모습(1984. 11.)



    운천동의 동종은 물론이고 인근의 흥덕사지나 사뇌사지에서 발견된 청동 유물들도 모두 일정한 장소에 인위적으로 매장되었던 것으로 밝혀져 그 궁금증이 더하다. 사찰에서 갑작스러운 변고가 생겨 사용하던 중요 기물들을 한 곳에 묻어 두는 것을 퇴장(退藏)이라 하는데, 운천동 일대의 절터들이 하나같이 퇴장 유물에 의해 확인된 것이어서 주목된다.  
    퇴장 유물들을 살펴보면 모두 고려 말기 이전의 것이다. 흥덕사지에서 발굴한 기와 중에는 통일신라의 것이 있고, 이곳에서 발견된 동종도 신라 종으로 추정되고 있어 상한은 통일신라 하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퇴장 유물의 하한은 고려 말기이다. 조선 건국 이후의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곳 운천동 절터와 흥덕사지는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확인되었고, 사뇌사지는 발굴하지는 않았으나 5백 점에 가까운 유물을 퇴장한 것으로 보아 역시 전란 등으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고려 말에 청주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외침을 받아 소실되었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혹자는 몽골의 침입에 의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경주 황룡사지 등 몽골의 침략으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은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 사실이다. 합단적 또는 홍건적의 침입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청주의 주요 유적들이 파괴된 것은 몽골이나 합단적 또는 홍건적 모두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고려와 몽골 사이의 전쟁은 1231년부터 1259년까지 6차에 걸친 침입에 의한 것이었고, 합단적이 고려에 침입한 것은 1290년이며, 홍건적은 1359년의 1차 침입과 1361년의 2차 침입이 있었다. 이러한 외침을 받아 전국이 유린을 당하고 문화유산이 파괴된 가운데 청주에도 막심한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흥덕사지에서 『직지』를 간행한 해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이므로 이때까지 청주 일대의 사찰들은 명맥이 유지되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운천동 지역의 사찰들이 외침을 받아 주요 유물은 퇴장한 것은 그 이후여야 한다. 
    마침 조선 초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5 충청도 청주목 효자 편에 손유(孫宥)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고려 우왕 4년(1378)의 왜구가 청주에 침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즉 손유는 고을의 벼슬아치인데, 신우(辛禑, 즉 우왕) 4년에 왜구가 그가 사는 동네에 침입하여 어린 아들딸들이 옷을 붙잡고 울부짖었으나 손유는 돌아보지 않고 즉시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업고 도망쳐 해를 면하였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요즘의 부모와는 다르게 왜구가 쳐들어오자 어린 아들딸을 뿌리치고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구했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1378년에 청주에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해는 『직지』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바로 다음 해이다. 그리고 『직지』는 여주 취암사에서 1378년 6월에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되었다. 1377년 7월에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11개월 후이다. 이때 청주에서는 흥덕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이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효자 손유와 관련된 왜구의 침입 사실을 통해서이다. 곧 인근의 흥덕사와 함께 이 절도 왜구의 분탕질로 인해 소실되었고, 사찰의 귀중한 불교용품인 동종은 땅속에 묻어 후일을 기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왕조가 종말에 이르던 시기에 퇴장된 동종을 비롯한 운천동 지역 절터들의 청동 유물들은 조선왕조를 뛰어넘고 약 6백 년이 지나서 우연히 발견되어 국립청주박물관의 금속공예실을 가득 채우는 보물들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찬란하였던 고려 금속 공예의 멋을 보여주며 청주가 공예비엔날레의 도시로 재탄생하는 명분을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으로 평가받는 신라 범종은 국내에 3점만이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오대산 상원사 동종이고, 규모와 조형의 백미는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이다. 그리고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신라 범종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한편으로 운천동을 새롭게 조명하게 하였다. 
    동종은 사찰의 종루에 걸어놓고 당목(撞木)으로 쳐서 때를 알리거나 대중을 모을 때 사용하는 큰 종으로서 경종(警鐘)·조종(釣鐘)·당종(撞鐘)·범종이라고도 한다. 불교의식에서 소리를 내기 위해 사용하는 법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동종인데 법고·운판(雲版)·목어와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 또는 사중사물(寺中四物)이라 한다. 법고는 땅을, 목어는 물을, 범종은 불을, 그리고 운판은 바람을 각각 상징하고, 또 법고는 육지 중생, 목어는 어류 중생, 범종은 지옥 중생, 운판은 허공 중생을 제도하는 의미가 있다. 
    동종은 불전사물 가운데서도 우리나라 금속공예품을 대표하는데 그 기원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중국 고대 악기의 일종인 용종(甬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또 하나는 용종과 풍경이 혼합한 형식이 점점 발전되어 범종을 이루게 되었다는 설이다. 공통되는 점은 고대의 악기로서 편편하게 생긴 용종을 본떠 만든 것이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용종은 중국 주대에 만들어져 성행하다가 전국시대 이후부터 다른 예기(禮器)와 같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악기의 일종이다. <4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