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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문화의 젖줄 무심천-1부

2024-03-28

문화 문화놀이터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 여행]
청주문화의 젖줄 무심천-1부
'-숨겨진 운천동 이야기- 구루물 산책'

    ‘구루물 산책’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도시이야기여행]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단행본입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운천동의 숨겨진 다채로운 발굴 이야기를 흥덕사지를 발굴한 지역 전문가를 통해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엮은 책입니다. 
Cheapter2. 청주문화의 젖줄 무심천
    청주의 도심을 동서로 가르고 북쪽으로 흐르는 무심천(無心川)은 운천동을 지나 까치내에서 미호강으로 흘러드는 지방하천으로 금강의 제2지류이다. 우암산과 함께 청주를 대표하는 산천으로서 청주 역사문화의 젖줄이며 보물창고이다. 운천동 지역에 많은 문화유산이 몰려 있는 지리적 환경은 곧 무심천이다. 무심천이 있기에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청주가 점차 큰 도시로 발전해 갈 무렵 운천동은 그 중심에 있었다. 무심천의 발원지는 낭성면 추정리 산정말로 보는 설과 가덕면 내암리로 보는 설이 있는데 옛 문헌기록에는 모두 문의 적현(赤峴)으로 적혀 있어 내암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내암에서 흘러내린 물과 산정말에서 내려온 물이 금거리에서 합쳐져 서쪽으로 곡류하다가 상대리에서 북으로 방향을 바꾸어 청주 원도심의 서편을 가로질러 미호강과 금강을 거쳐 서해에 이른다. 

 
左)호서읍지 청주목지도  右)호서전도 청주목지도



    무심천의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대교천(大橋川)이라 적혀 있는데, 여기서 대교는 곧 석교동 육거리시장에 매몰되어 있는 남석교를 말한다. 즉 남석교 같은 큰 다리가 가설되어 있는 하천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호서읍지』의 「청주목지도」에는 무성천(茂城川)이라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와 『호서전도』 「청주목지도」에는 무심천(無心川)이라 기록되어 있어 18세기부터 점차 무심천 또는 무성천으로 불리었음으로 알 수 있다. 이밖에 심수(沁水) 또는 심천(沁川) 등의 명칭이 보이는데 이는 무심천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고지도에 무심천을 인공조림으로 조성된 봉림수(鳳林藪) 부근에 표기된 점이 주목된다. 이는 무심천이 본래 운천동 일대에서 부르던 하천 명칭이었다가 점차 확산되어 전체를 일컫게 되었음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무심천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무심하게 말없이 흐르는 내라는 설, 무심하고 무정한 내라는 설, 물이 없는 내 즉 무수천(無水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수심이 없는 내라는 의미의 무심천(無深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무성(武城)뚝 안으로 흐르는 심천(沁川)이라는 의미의 무심천(武沁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불교용어 ‘무심(無心)’에서 왔다는 설 등 갖가지 해석이 있다. 불교용어 ‘무심’에서 왔다는 설은 운천동 지역에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지, 동종이 출토된 운천동사지(구양사지), 5백여 점의 청동유물이 발견된 사뇌사지, 우리나라 최고의 신라사적비 등 불교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사실에 의한 추론이다. 그러나 정확한 문헌근거는 찾을 수 없다.

 
무심천



    무심천은 여러 번의 홍수와 직강 공사로 유로가 변경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무심천이 석교초등학교에서 서운동, 문화동, 우암동을 거쳐 청주농업고등학교 앞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내덕동 부근에서 현재의 유로를 따라 흘렀다는 설도 있으나 이것은 지류일 뿐이고, 청주의 고지도를 보면 본류는 청주 원도심에 있었던 청주읍성의 서쪽을 지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청주에는 큰 홍수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20세기에 들어서도 큰 물난리가 있었다. 특히 1906년 7월에 일어난 병오년 대홍수는 무심천의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고 유로가 변경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그해 7월 11일과 12일에 전국적으로 폭우가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충청도 일대에 더 심각하게 내렸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청주였다. 『청주연혁지』에는 ‘공전(空前)의 대홍수’라는 제목으로 서울보다 4일 이른 7월 7일(양력 8월 26일)부터 9일까지 연일 장대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고 하였다. 9일 밤에는 한층 맹렬해서 마침내 무심천이 범람하였고, 무심천 인근의 논과 밭이 진흙바다처럼 변했다고 한다. 7월 17일(양력 9월 5일)에 비로소 비가 그치고 물이 줄기 시작했다고 하니 무려 11일 동안 장대비가 억수같이 내린 것이었다. 당시 생생히 목격한 홍수 사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연일 삼대와 같이 쏟아지는 강우는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28일(음력 7월 9일) 밤이 되자 한층 맹렬해져서 무심천이 범람하여 논밭이 모두 흙탕물로 변했다. 전전긍긍하여 불안이 엄습했으면서도 물을 막으려고 사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비는 더욱 강해져서 물이 제방을 넘쳐흘러 위험은 시시각각 급박해져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 9월 1일 날이 밝을 무렵 읍민은 진위대 경내 및 남문과 서문의 누상으로 피난했다. 오전 8시경 은행나무가 서 있는 제방 수개처가 무너졌고, 도도히 달리는 말과 같은 기세로 밀려들어온 탁류의 일부는 성벽의 동부를 따라 북문 밖으로, 일부는 성벽에 충돌하여 남서부로 순식간에 성외 일대로 퍼져서 물길을 막았던 인가는 한쪽 끝부터 밀려 흘러내리거나 무너졌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침수되어 심한 것은 지붕 위까지 넘쳤다. 무심천 방향의 시장은 모두 유실되고 겨우 3호만 남았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