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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예술인 에이전시 ‘디스에이블드’ 김현일 대표

2024-06-24

비즈니스 피플조명


정책주간지 K-공감
발달장애 예술인 에이전시 ‘디스에이블드’ 김현일 대표
'대통령실 굿즈 협업 발달장애 작가 그림? 그냥 작품으로 봐주세요'

    친구를 기다리다 우연히 들어간 전시장.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미래를 바꿀 그림을 만났다.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의 빛으로 가득 채워진 캔버스, 컴퓨터로 그린 듯한 세밀한 묘사,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화적인 화풍. 그림들은 하나같이 자유롭고 독특했다. 그를 매료시킨 것은 발달장애인들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전시장을 찾는 발길은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림 이전에 ‘발달장애인’에 방점을 찍었고 그들의 예술활동은 취미 정도로 치부됐다. 그는 이런 현실을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2016년 우리나라 최초의 발달장애 예술인 에이전시 ‘디스에이블드’는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현일 대표는 디스에이블드를 만들고 9년째 발달장애 예술인과 세상을 연결하고 있다.
    디스에이블드는 발달장애 예술인의 작품으로 자체 굿즈(팬 상품)를 제작해 판매하고 전시회도 개최한다. 무엇보다 주된 사업은 기업들과의 다양한 협업이다. 대표적으로 SK텔레콤은 서울 중구 사옥의 거대한 미디어월(벽면 영상)을 디스에이블드 소속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몄다. 아시아나항공은 작가들이 그린 프랑스 파리 에펠탑, 중국 베이징 자금성 등 각국의 랜드마크 그림을 굿즈로 제작해 판매했다. 단순히 작가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작품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에이전시의 목표이기에 더 많은 ‘연결고리’를 통해 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현재 디스에이블드 소속 작가는 150명에 이른다. 그들의 작품은 예술로 인정받게 됐고 작가들은 자생력을 가진 예술인으로 거듭났다. 김 대표는 “다양한 사업을 통해 발달장애 예술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2주년을 맞아 대통령실이 5월부터 판매를 시작한 굿즈에도 디스에이블드 소속 작가들의 작품이 담겼다. 에코백, 파우치, 메모지 등에 새겨진 작품들은 서울 용산어린이정원을 찾는 방문객과 만나고 있다. 굿즈에 활용된 작품은 앞서 윤 대통령이 취임 직후 용산 대통령실 로비 등에 전시한 것이기도 하다. 김 대표는 “대통령실 굿즈를 통해 더 많은 분이 발달장애 예술인들의 작품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디스에이블드’ 김현일 대표가 발달장애 예술인의 작품이 담긴 대통령실 굿즈(에코백)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우연히 발달장애 예술인의 작품을 본 게 창업의 계기가 됐다고요.
    대학생 때 친구를 기다리다가 더위를 피하기 위해 근처 전시장에 들어갔어요. 그곳에 있던 작품은 기존에 봐온 그림들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어요. 색감도 특이하고 저마다 스토리가 있는 것 같았죠. 발달장애 예술인들이 그린 거라고 하더군요. 어린 시절 윗집에 발달장애 피아니스트가 살아서 발달장애인 중 예술적 자질이 높은 이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림에도 재능이 있는 이들이 많다는 걸 그때 알았죠. 그런데 전시가 큰 관심을 받지 못하더라고요. 이 그림들을 활용해 뭔가 만들어 팔면 작품을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창업으로 이어졌어요. 
예술인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주변의 시선에 상처받은 사람도 많고 여러 번 사기를 당했다는 이들도 있었어요. 그림을 매개로 접근했다가 이용만 하고 제대로 된 도움은 주지 않았던 거죠. 그렇다보니 부모들도 자녀가 예술가로 활동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없었어요. 그림은 그저 취미활동으로만 여겼죠. 창업 초기엔 그림대회 시상식 등을 무작정 찾아가 밥 먹으며 친분을 쌓고 천천히 설득해나갔어요. 그림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면 돈도 벌고 작품활동도 계속할 수 있다고요. 
지금은 기업들과 협업이 활발해요.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중요해지다보니 그런 관점에서 협력을 요청해오는 경우가 많아요. 최근에는 작품이 좋아서 마케팅 요소로 활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고요. SK텔레콤과는 2021년부터 협업하고 있어요. SK텔레콤 사옥의 미디어월을 소속 작가들의 작품으로 꾸미고 소비자들에게 발송하는 통신요금 청구서에 작품을 싣기도 했죠. 또 새마을금고의 사내 환경 프로젝트에 참여해 소속 작가들의 작품을 담은 컵을 제작했고, LG에너지솔루션의 발달장애아동 돕기 프로젝트에 소속 작가를 파견해 그림을 가르쳤어요. 기업 제품만 제작하는 게 아니라 공간 큐레이션, 사내 프로그램 기획까지 사업 영역이 무척 넓어요. 
작품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요?
    전시에 무려 다섯 번이나 온 분이 있었어요. 우연히 지나가다 그림을 봤는데 혼자 보기 아까워 어머니, 동생, 친구들을 데리고 왔대요. 이런 작품을 볼 수 있게 해줘 고맙다고 저에게 감사인사를 하더군요. 그만큼 반응은 좋아요. 이제는 팬을 가진 작가도 생겼죠. 전시에서는 굳이 발달장애 예술인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아요. 드라마 등을 통해 발달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들의 작품이라고 하면 편견이 있으니까요. 대신 소속 작가 전시회의 경우 ‘하티즘(마음주의)’ 전시라는 용어를 씁니다. 작품을 마음껏 그리는 작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만든 말이에요. 
마음주의? 모든 예술작품은 마음대로 창작한 것 아닌가요?
    발달장애 예술인들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이들이 아니에요. 대중에게 어떻게 보여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다른 작품의 영향도 안 받아요. 그야말로 자신 안의 생각으로만 그려요. 진정한 의미의 ‘자기 마음대로’인 거죠. 특히 한 가지에 꽂혀서 그것만 그리는 작가가 많아요. 어린 시절부터 코끼리, 토끼, 해바라기만 그려온 작가들도 있어요. 그런 그림은 작가의 특성이 단번에 드러나죠. 이밖에도 발달장애 예술인들의 작품은 세밀한 묘사로 무척 밀도가 높고 과감한 색감을 사용하는 등 몇 가지 특징이 있어요. 하지만 여느 예술처럼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세계가 공존해요. 편견 없이 하나의 작품으로 감상하면 좋겠어요.
작품이 대통령실 굿즈로 제작되면서 더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됐어요.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직후 용산 대통령실 1층 로비에 소속 작가 10여 명의 작품이 전시했어요. 윤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발달장애 예술인들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검찰총장 시절 발달장애 예술인의 작품을 구매한 것도 잘 알려져 있죠. 대통령 취임 2주년 굿즈는 지난해부터 기획한 거예요. 대통령실 로비에 전시된 그림은 화합이나 평화 등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은데 그걸 이번에 에코백, 파우치, 메모지, 스티커 같이 일상에서 쉽게 쓸 수 있는 제품에 담았어요. 
수익금을 기부할 계획이라고요.
    대통령실 굿즈 제작에 참여한 건 작가와 작품을 알릴 수 있는 무척 좋은 기회예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혜택을 우리가 다 가져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줘야죠. 기부금은 작가의 이름으로 좋은 곳에 쓸 예정이에요. 
작가들의 자립 기반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까지 왔나요?
    인기 작가의 경우 한 작품이 수백만 원에 팔려요. 1년에 억대 수입을 올리는 이들도 있죠. 예술작품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는 것 같아 뿌듯해요. 예전에는 ‘정말 장애인이 그린 그림이 맞냐’며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물론 아직 큰 수익을 얻지 못하는 작가가 더 많아요. 경제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해 13명의 작가를 정규 직원으로 고용했어요. 정해진 급여를 받고 재택근무로 그림을 그립니다. 
‘하티즘’ 온라인 플랫폼도 작가들의 자립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전 세계 발달장애 예술인 누구나 이곳에 자신의 작품을 손쉽게 올릴 수 있고 누구나 감상할 수 있어요. 작가들은 그림은 잘 그리지만 그림을 알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저희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사업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터준 거죠. 발달장애인은 사회 규칙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고 의사소통도 쉽지 않아 다른 장애인보다 취업이 더 어려워요. 발달장애인 고용률은 2021년 기준 29.3%에 불과해요. 그들의 직업선택 기회를 늘리는 건 중요한 문제예요. 
경제적 이득 외에도 작품활동이 작가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 같은데요.
    성인 발달장애의 경우 크게 호전되기 어려운데 작가들을 보면 시작했을 때와 지금의 모습이 정말 달라요. 중증장애가 크게 호전된 모습도 봤어요. 특히 자신의 작품으로 전시회도 열고 굿즈로 만들어진 걸 보면서 자부심을 느껴요.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림도 발전하는 것 같아요. 
또 다른 사업 계획이 있나요?
    우리 기업의 목적은 발달장애 예술인을 일방적으로 돕는 게 아니라 상생하는 데 있어요. 발달장애인이 그림을 통해 한 명의 직업인으로, 예술인으로 서는 건 우리 사회에도 좋은 일이죠. 더 많은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에이전시에서는 치료와 교육을 접목한 미술교육을 해오고 있어요. 발달장애 예술인들이 드라마나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미술을 하려는 이들이 정말 많아졌거든요. 원하는 분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앞으로는 온라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공할 생각입니다.
    디스에이블드 소속 작가인 김채성 씨는 “이전에 비장애인과 어울릴 때면 뒤처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림을 통해 발달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초등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칠 땐 “그림은 마음껏 그리면 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고 한다. 이처럼 캔버스를 통해 발달장애 예술인들이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일, 그 여정에 비장애인이 함께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만드는 일이 디스에이블드의 존재 이유다. 김 대표는 말한다. “‘Disabled(디스에이블드·장애)’는 ‘This abled(이것은 가능하다)’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