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로 나와 뒤돌아 몇 걸음 걸으면 창신동을 관통하는 골목길 입구가 나온다. 길을 따라 고시원, 약국, 편의점, 식당 등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건물들이 이어진다. 창신동은 서울의 중심인 종로구에 위치해 있지만 서울에서 몇 남지 않은 달동네다. 차가 다니기 힘들 만큼 비좁은 골목길, 가파른 계단길 옆으로 노후된 주택들이 이어진다.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뭐든지 아트하우스’는 창신동 꼭대기 방향의 가파른 경사 위에 위치해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기온이 부쩍 떨어진 1월 초, 배달 짐을 실은 오토바이들만 부산하게 달릴 뿐 인적이 뜸한 길에 이따금 캐리어를 끌고 내려오는 청년들이 눈에 띈다. 최근 몇 년 사이 낙산길 인근에 카페, 게스트하우스 등 ‘핫플레이스’가 들어서면서 달라진 풍경이다.
과거 창신동은 매일같이 미싱이 돌아가는 봉제공장 마을이었다. 197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들이 임대료 상승을 피해 창신동으로 옮겨오면서 봉제골목이 형성됐다. 동대문 의류 상권과 가까워 호황기를 누렸던 이곳도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 의류시장이 다품종 소량생산화되면서 한때 3000여 곳이 넘던 봉제공장이 하나둘 사라졌지만 수백 곳이 여전히 창신동을 지키고 있다.
봉제공장 사이 아트하우스 창신동 골목골목을 다니다 보면 간판 없는 작은 봉제공장들이 한 집 건너 한 집이다. 좁게 열린 문틈 사이로 미싱 돌리는 소리가 한창이다. ‘통닭집’, ‘비디오 가게’라는 낡은 간판이 붙은 곳도 안을 들여다보면 봉제공장이다. 길 입구에서 걸어서 창신동 꼭대기를 향해 10여 분, 숨이 가파올 때쯤 가파른 경사가 이어지는 곳에 이색적인 건물이 보인다. 붉은 벽돌의 지하 1층·지상 5층 건물로 낡은 빌라들 틈에서 유독 눈에 띈다. 문화예술 사회적기업 아트브릿지(대표 신현길)가 2021년 4월에 문을 연 ‘뭐든지 아트하우스(이하 아트하우스)’다. 아트하우스는 ‘예술과 함께 숨 쉬는 공간, 창신동 영혼의 소방서’가 되겠다는 뜻을 담아 ‘종로구 창신길 119’에 자리 잡았다. 건물 뒤편의 한양도성을 모티브로 해 비탈길에 적색 벽돌을 켜켜이 쌓아 세웠다.
左) 뭐든지 아트하우스의 6층 루프톱에서 바라본 뒤편 전경 右) 1층은 책방 겸 카페로 운영 중이다. (사진. C영상미디어)
아트하우스는 지하 1층 ‘뭐든지 소극장’을 필두로 1층 ‘뭐든지 책방·카페’, 2층 ‘뭐든지 공유오피스’가 자리 잡고 있다. 3~5층까지는 ‘뭐든지 하우스’, 6층은 루프톱이다.
루프톱부터 올랐다. 고지대에 있다보니 탁트인 전망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정면으로는 옹기종기 모인 다세대주택과 초록색 방수페인트를 칠한 옥상이 눈 아래로 펼쳐지고 그 너머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보인다. 몸을 조금 돌리면 산의 단면을 잘라낸 듯한 채석장의 수직절벽이 보인다. 경복궁 주요 전각, 서울역, 한국은행 등 서울의 주요 건물들이 이곳 채석장의 돌로 만들어졌다. 루프톱에는 테이블과 좌석, 햇빛 가림막이 마련돼 있다. 따스한 계절이 돌아오면 이곳은 바비큐장으로 변신한다.
루프톱 아래로 세 개 층은 만 39세 이하 청년과 예술인을 위한 주거공간이다. 총 4세대가 거주할 수 있다. 평균 임대료는 보증금 2000만 원·월세 20만 원으로 주변 시세 대비 70% 저렴한 수준이다. 때문에 임차인이 이사를 가는 경우가 드물고 이사를 가더라도 지인에게 공실 정보를 공유해 물려주기 때문에 뭐든지 하우스에 입주하기란 쉽지 않다.
2층은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유오피스다. 문화예술 및 지역재생 전문서적이 주로 진열된 1층 ‘뭐든지 책방·카페’는 창신동 골목길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이날 창신동에 들렀다 카페를 찾아 이곳에 온 관광객들을 적잖이 볼 수 있었다. 매주 월·일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려 있다.
아이들 놀 수 있게 온돌 바닥 소극장 지하 1층 소극장은 서른 명쯤 들어설 수 있는 규모다. 신발을 벗어야 하는 소극장에 들어섰다가 순간 깜짝 놀랐다. 발바닥이 뜨끈했다. 아이들이 바닥에 누워서 놀 수 있도록 바닥에 보일러를 깔았다고 한다. 아마 온돌 극장은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소극장은 아트하우스가 내세우고 있는 ‘창신동 영혼의 소방서’의 근간이다. 미싱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는 창신동의 팍팍한 일상에 문화와 예술의 향기를 불어넣고 있다.
2022년 아트하우스는 극단 학전 김민기 대표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재구성한 음악극 ‘창신, 공장의 불빛’을 선보이기도 했다. 음악극에는 창신동의 실제 봉제공장 주민을 배우로 내세웠다. 난생 처음 무대에 선 배우의 노래 실력은 문제가 아니었다. 서툰 실력으로 노동자의 삶을 토해내는 진솔한 노래에 배우도 관객도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2022년 실제 봉제공장 주민을 배우로 내세운 음악극 ‘창신, 공장의 불빛’이 ‘뭐든지 소극장’에서 열렸다. (사진. C영상미디어)
아트하우스의 역할은 창신동 주민과 예술을 잇는 것이다. 그 시작은 2012년 아트브릿지와 주민들이 함께 창신동 산마루턱에 연 ‘뭐든지 도서관’이었다. 뭐든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뭐든지’는 동네 초등학생 민주 양이 붙인 이름이다. 도서관은 연립주택 반지하 크기에 불과했지만 오후 6시 이후와 주말이면 문을 닫는 구립도서관을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지역 아이들은 이곳에서 책을 읽고 연극 활동을 배웠다. 그러나 연극 연습을 하다보니 독서하는 아이들에게 방해가 됐다. 그 대안으로 2013년 근처에 별도 공간을 마련해 ‘뭐든지 예술학교’를 세웠다. 연극 연습뿐만 아니라 ‘그날의 식물’을 정해 화분을 만드는 등 ‘뭐든지’ 할 수 있는 배움놀이터였다. 평소 연극에 관심을 두지 않던 부모들도 아이들이 공연을 할 때면 예술학교에 모였다. ‘동네 사랑방’이 따로 없었다.
문화생활을 누릴 여유가 없었던 주민들을 위해 아트브릿지는 ‘꼭대기 장터(2015)’, ‘창신문화밥상(2017~2019)’ 프로그램 등을 기획했다. 꼭대기 장터는 마을 꼭대기에서 열린 플리마켓이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지역 아동센터 아이들이 졸업여행 비용을 마련할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다. 덕분에 아이들은 장터에서 번 돈으로 통영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문화를 통해 창신동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의미를 담은 ‘창신(創新)문화밥상’은 문화나눔 축제다. 점심식사도 일터에서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배우들이 도시락을 배달하고 막간 공연을 선물하는가 하면 전시, 공연 등을 통해 주민이 함께하는 마을 잔치였다.
2018년에는 창신문화밥상의 일환으로 주민 패션쇼 ‘창신동 런웨이’도 열렸다. 평생 봉제 일만 해온 주민들이 직접 만든 의상을 입고 패션쇼의 주인공이 됐다. 한 봉제사는 “알아주지 않는 디자이너인 내가 패션쇼를 열다니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가 이뤄졌다”는 소감을 남겼다.
주민과 예술을 잇다 처음에는 문화예술 활동을 하겠다며 창신동에 둥지를 튼 ‘외지인’인 신현길 대표를 곱지 않게 보는 주민들도 있었다. 2013~2014년 뉴타운 재개발 이슈로 주민들이 대립하면서 창신동 골목에 험악한 분위기가 돌던 때도 있었다. 이해관계 탓에 갈린 의견은 서로에게 상처가 됐지만 문화예술로 조금씩 치유됐을 것이라고 신 대표는 믿는다. 창신동에 입성할 때 “주민들과 배우들이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만들겠다”는 신 대표의 다짐은 음악극 ‘창신, 공장의 불빛’으로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예술로 지역 활력’ 프로젝트를 통해 청년 예술인들과 지역 문제를 문화예술로 풀어내고 있다. 그 과정은 ‘예술로 지역활력’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이제 창신동 주민이나 다름없는 신 대표는 “어르신들이 제 얼굴을 다 알기 때문에 함부로 침도 못 뱉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도 들킬까봐 걱정한다”며 웃었다. 신 대표가 주민에게 스며든 것처럼 ‘아트브릿지’도 창신동의 일상에 녹아들고 있다. 시간의 변화가 더디게 느껴지는 창신동 골목에 문화예술을 불어넣기 위한 ‘아트브릿지’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