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달력의 마지막 장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보람도 없이, 더 나아진 것도 없이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때 한없이 우울해진다. 자책감으로 가슴 한 켠이 묵직해진다.
아무리 우리 처지가 어렵다한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세한도(歲寒圖)’를 그릴 당시에 비할 만하겠는가.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 되던 1844년(59세)에 그린 작품이다. 당시의 제주도는 지금 같은 휴양지가 아니라 그야말로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형벌의 땅이었다.
머나먼 절해고도(絶海孤島)에 55세 나이로 갇히게 됐으니 정치생명이 완전히 끝났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기를 4년이 지났다. 많은 사람이 그를 외면했다. 그런데 제자였던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의 의리는 변함이 없었다.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언제든지 김정희가 필요하다는 서책을 구해서 보내줬다. ‘세한도’를 그리기 전해에는 계복의 ‘만학집’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를 부쳐주고 그 다음해에는 하장령의 ‘황조경세문편’ 120권도 보내줬다. 모두 구하기 힘든 한정판 귀중본으로 이상적이 중국에 가서 직접 구한 외국서적이었다. 그 책을 받아든 스승 김정희는 제자의 행동에 감동했고 그림으로 보답했다.
김정희, ‘세한도’, 종이에 먹, 23.7×1388.95㎝,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은 제목과 화면 그리고 발문으로 구성됐다. 제목은 논어 ‘자한’에 나오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에서 ‘세한(歲寒)’을 가져왔다. 제목 옆에는 ‘우선! 이것을 감상해보게. 완당(藕船是賞 阮堂)’이라고 적고 화면에는 초가집을 중심으로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양쪽에 배치해 세한의 느낌을 살려냈다. 늙은 소나무는 추사 자신을, 싱싱한 측백나무는 젊은 제자를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서체로 사연을 적었다. 책을 보내준 이상적이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도 성글어진다’는 사마천의 말과는 다르다는 내용을 적은 다음 공자님의 말씀으로 제자의 의리를 칭찬한다. 제자를 칭찬하는데 사마천과 공자까지 소환할 정도로 스승의 마음이 흐뭇했음을 반영한다.
간략하게 그린 집과 나무에서 평소 남종문인화를 즐겨 그린 그의 취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도 좋지만 글씨를 처음 배운 학생처럼 줄과 열을 맞춰 반듯반듯하게 쓴 예서체는 더욱 좋다. 괴기스럽다고 평가받는 추사체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에 대한 스승의 마음이 숙연함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자제해 제자가 돋보이게 하려는 배려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김정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배생활에 대한 절망감과 한양의 본거지에서 밀려났다는 고립감이 수시로 밀려와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견뎌야만 한다. 그도 그 시간을 온전히 견뎠다. 그 과정에서 ‘세한도’가 탄생했다. 결국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를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세한도’라는 걸작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론적인 얘기다. 만약 유배를 떠나기 전 김정희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수긍했을까.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빈손으로 보낸 것 같은 올해도 각자의 세한도를 그리기 위한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종환의 시 ‘세한도’의 다음 구절은 절해고도에 갇힌 듯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폭설에 덮인 한겨울을 견디는 모든 것들은/ 견디며 깨어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
우리가 허송세월한 것처럼 보냈던 지난 시간에 설령 세한도를 그리지는 못했더라도 다른 무엇인가로 채워넣었을 것이다. 그러니 올 한 해도 끝까지 잘 버텨준 자신에게 고생 많았다고 격려의 말을 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