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은 조선시대 개혁 군주였던 정조대왕의 효심과 부국강병, 태평성대의 꿈이 응축된 야심작이었다. 완공 후 220여 년이 흐른 지금 경기 수원시민들의 힐링 명소가 된 수원화성에서는 매년 10월 정조의 정신을 기리는 수원화성문화제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지역문화매력 100선 ‘로컬100’으로 올해는 10월 4~6일 다양한 행사가 진행됐다. 수원화성문화제를 전후로 수원화성은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는 축제의 장이 된다. 최근에는 인기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이하 ‘선업튀’)’ 와 ‘그 해 우리는’ 촬영장소로 알려지면서 수원화성 곳곳에 드라마의 흔적을 찾아 나선 젊은층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정조대왕 능행차 등을 재현하는 ‘수원화성문화제’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가을이 찾아온 수원화성 주변 풍경은 청춘 드라마가 따로 없다. 어딜 가나 ‘선업튀’ 속 남자 주인공 선재(변우석 분) 같고 여자 주인공 솔(김혜윤 분) 같은 청춘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다. 드라마에서 선재가 솔이와 거리 응원에 나섰다가 고백하는 곳으로 등장한 화홍문(북수문), 방화수류정에 이르는 코스뿐 아니라 화성행궁, 장안문, 창룡문, 연무대 등 그야말로 수원화성 곳곳은 커플 천국이다. 나들이객과 역사 탐방이나 답사를 위한 발걸음까지 더해져 주말이면 곳곳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출발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수원화성에 대해 배경지식부터 쌓고 싶다면 ‘수원화성박물관’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된다. 수원화성의 구조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축소 모형을 시작으로 수원화성을 축성하게 된 계기와 역사적 배경, 축성 과정에 대한 전시물이 관람 동선에 따라 짜임새 있게 기다린다.
총 공사기간만 2년 9개월, 총 공사비용이 87만 냥이었다는 수원화성 축성에 얽힌 뒷이야기들이 깨알처럼 펼쳐진다. 국왕부터 돌을 나르는 인부까지 무려 70여만 명이 참여했고 당시로선 파격적인 성과급제와 공사실명제를 시행했다는 얘기도 흥미롭다. 거중기를 사용하고 못 하나마저 기록으로 남겼다는 방대한 축성 기록들도 볼거리다.
수원화성박물관을 나서 본격적인 성곽길 탐방은 화성행궁에서 시작한다. 박물관에선 걸어서 5분 거리다. 화성행궁은 수원화성의 부속 건물로 지어져 지금은 수원화성의 무게중심이 되는 곳이다. 1789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의 능침(陵寢)을 양주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소재)에서 수원부 읍치 자리(현 경기 화성시 안녕동 융건릉)로 이장하고 신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관청으로 건립됐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아버지의 능침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쉬어갔던 행궁(行宮)에는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공간들이 속속 자리하고 있다. 봉수당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인 진찬연을 성대하게 열어줬던 곳. 봉수당 안쪽엔 당시를 재현한 전시물이 관람의 재미를 더한다.
정조를 시작으로 순조, 헌종, 고종을 비롯한 역대 조선 왕들이 머물렀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05년 훼손되기 시작해 주요 건물이 의원과 경찰서 등 일본 통치 기구로 쓰이면서 제 모습을 잃었다. 1989년 복원사업이 시작돼 지난봄 개방한 ‘우화관’과 ‘별주’를 끝으로 복원 2단계를 마무리하면서 온전한 모습으로 탐방객을 맞이하고 있다.
左) 인기 문화유산 야행 중 하나인 화성행궁 야간개장. 복원한 ‘별주’ 옆 연못에 커다란 달 조형물이 가을밤을 수놓고 있다.
右) 일몰 후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 들어서면 미디어아트가 정조대왕 능행차 등을 재현하는 ‘수원화성문화제’
복원 마무리를 기념하기 위해 10월 27일까지 야간개장 ‘달빛화담’을 연다. 달빛 아래 형형색색 조명으로 옷을 갈아입은 행궁을 색다르게 즐기기에 좋다. 우화관과 유여각 부근 대형 꽃 설치 작품엔 고아한 조명이 더해져 행궁의 밤을 수놓는다. 봉수당 뒤편 고즈넉한 후원엔 수원시 규방공예 작가들이 직접 만든 청사초롱이 낮보다 더 아름다운 밤길로 안내한다.
수원화성 성곽길 한 바퀴 전체 5.5㎞의 성곽 안팎으론 볼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해 지루할 틈이 없다. 산 능선을 따라 이어져 경사가 있고 코스가 긴 한양도성과 달리 수원화성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완만한 경사에 코스가 부담 없어 남녀노소 누구나 성곽길 완주에 도전해볼 만하다.
어느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든 상관없지만 접근성이 좋아 ‘사통팔달 문’으로 통하는 장안문에서 출발해 화홍문 방향으로 걸으면 화성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방화수류정’부터 만난다. 북암문 쪽에서 바라보는 방화수류정의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이어지는 동북포루를 지나면 정조대왕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고 훈련하던 연무대가 나온다. 지금은 국궁체험장으로 국궁 체험을 해볼 수 있다.
방어 시설 중에서도 정교함이 느껴지는 동북공심돈,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도 거친다. 동1포루 부근은 사방이 확 트여 개방감을 느끼기에 좋다. 성 밖 주택가와 눈높이가 비슷한 구간도 지난다. 위압적이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성곽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정조의 애민정신이 느껴지는 듯하다. 동남각루 부근에선 성곽길이 잠시 끊긴다. 팔달문 주변으론 전통시장이 형성돼 있어 한 끼 해결하고 성곽길 걷기를 이어가도 좋다. 유명한 ‘수원통닭거리’도 가까이 있다.
성곽길에 진입하기 위해 잠시 경사 구간을 오르면 서남암문, 서남각루에 도착한다. 팔달산 정상에 자리한 서장대는 수원화성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다만 오르는 길이 성곽길 코스 중 가장 ‘난코스’에 해당한다. 서장대에선 수원화성은 물론이고 성 안팎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코스를 거칠 때마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 봤던 전시 내용과 오버랩되는 기록이나 내용이 등장하기도 한다.
억새 군락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수원화성 서북각루와 화서공원 (사진. C영상미디어)
수원화성 성곽길은 시시각각 보이는 풍경과 걷는 감회가 다르게 느껴진다. 10월에 들어서면 화서문, 화서공원 주변엔 억새가 군락을 이뤄 군무를 춘다. 가을 운치를 만끽할 수 있다. 방화수류정은 봄과 가을에 피크닉 성지가 된다.
창룡문 방향에선 거대한 관광 열기구인 ‘플라잉수원’이 뜨고 내린다. 성곽길 완주보다 왕처럼 어차에 앉아 일부 구간만이라도 편히 둘러보고 싶다면 ‘화성어차’ 체험(유료)을 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수원화성 성곽길 주변 명소도 지나칠 수 없다. 화성행궁 옆 행궁동이라고 해서 ‘행리단길’이라 이름 붙은 거리엔 공방, 갤러리, 카페, 식당이 밀집해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한때 슬럼화가 진행되기도 했으나 행궁동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특색 있는 동네다.
수원문화재단에선 마을해설사와 함께 하는 ‘행궁동 왕의 골목여행(최소 7일 전 수원 누리집 예약)’도 선보이고 있다. 총 4가지 코스로 나뉘며 코스에 따라 나혜석 생가터, 북수동성당, 팔부자 문구거리, 수원화성박물관, 남문시장 등 굵직한 명소들을 둘러본다. 새로 추가된 ‘K-드라마 길’이 젊은층에게 인기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김밥집과 ‘선업튀’ 속 주인공 선재네 집 등 드라마 촬영지를 테마로 한 코스다. ‘그 해 우리는’에 나온 지동벽화마을도 가볼 만하다. 아날로그 감성의 벽화가 그려진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잊고 있던 추억들이 하나둘 소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