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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은 곧 대한의 혼이다

2022-05-10

라이프가이드 여행


찰랑찰랑 무심천 발원지 따라
우리의 마음은 곧 대한의 혼이다
'신규식 / 신홍식 / 신형호'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죽음으로써이다. 우리들의 마음이 아직 죽어버리지 않았다면 비록 지도가 그 색깔을 달리하고 역사가 그 호칭을 바꾸어 우리 대한이 망하였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하나의 대한이 있는 것이니 우리들의 마음은 곧 대한의 혼이다. _ 신규식 ‘한국 혼’ 중에서 
두 눈 뜨고 볼 수 없던 조국의 현실 _ 신규식
    식민지가 된 조국을 보노라면 차라리 죽음으로 그 치욕을 씻고자 하는 마음이 일었을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예관 신규식은 음독자살을 기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때 일로 한 눈을 실명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오른쪽 눈을 뜰 수 없었던 신규식은 ‘곁눈질로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을 호로 쓰게 되었다. 나라 잃은 아픔을 안겨준 일제에게 대항하고 저항하는 의미에서 ‘일제를 흘겨봄’의 뜻도 담기지 않았을까 신규식의 애국애민정신을 새겨본다.
 
左)산동삼재山東三才         右) 신규식선생 부인 묘

    신규식(1879~1922)은 신백우, 신채호와 함께 고향에 산동학교, 문동학교를 열어 애국계몽운동에 나섰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해혁명에 가담하였으며, 쑨원을 비롯한 중국 국민당 지도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최초로 공인받은 외교적 역량을 발휘한 인물이다. 초창기 임시정부에서 실질적으로 중국 내 활동의 기반을 닦은 신규식은 1921년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으로 활동했다. 1922년 임시정부 안에 파벌과 내분이 생기자 ‘임정과 삼천만 동포를 잘 보살펴줄 것’을 당부하며 단식에 들어간 지 25일에 이르러 43세 나이에 안타깝게 순국하였다. 
    인차리에 있는 신규식 생가는 현재 남아있지 않고 고령신씨 일가가 그 터에 한옥을 건립해 거주하고 있다. 가을 처마마다 매단 탐스러운 곶감이 따뜻한 온기로 전해져 가족묘지에서 느낀 스산함은 조금 덜 했다. 가족묘지의 신규 식 선생 묘는 가묘로서 표석과 비석이 서 있고 유해는 중국상해 만국공원(지금은 송경령능원)에 안치되었다가 문화혁명 기간 중에 분실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마침내 1993년 국내로 이장하여 국립서울현충원 임정요원 묘역에 유해가 모셔졌다.
    43년 간의 신규식의 삶은 불꽃 그 자체였다. 자신의 삶과 나라의 독립을 하나로 생각하였던 애국지사였다. 사사로운 개인적 이해를 뒤로하고 사재를 모두 털어 상해 임시정부의 주춧돌을 놓았던 독립운동가 신규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도 고향을 굽어보는 독립운동가 _ 신홍식
    독립운동가 신홍식 묘소는 인차리 가덕면사무소 맞은편 농협 옆길 표지판을 따라 잘 닦여진 오름길을 5분만 오르면 만난다. 가덕면 소재지인 인차리가 한 눈에 들어오는 풍광 좋은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사후에도 가덕면을 굽어보며 지역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해 줄 국세이다.
    비만 오면 질척해졌던 현재의 묘소 아래 도로변에 서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기고부터 묘역 관리가 단정하게 이루어지고있다. 
    독립운동가이며 감리교 목사였던 신홍식(1872~1937)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이승훈, 오화영, 정춘수, 오기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그 후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목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신흥식 묘소
 
독립을 품고 청주로 잠입한 중학생 _ 신형호
    그 밤은 얼마나 긴박했을까. 독립선언서를 들고 청주로 내려오는 그 순간의 심장은 얼마나 고동쳤을까. 숨소리마저 발걸음 소리마저 비밀이어야 했을 그 날.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3·1만세운동을 준비하던 그 숨 가쁜시간속에서 신홍식은 ‘서울에서 연락군이 내려올 기미가 있다’는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망을 피해가지 못했다.
 
신형호 고가

    담대하게 거사를 준비한 연락책 신형호(1902~1947)는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중학교 재학생으로 3·1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청주로 귀향하였다.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알리면서 청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의하였다.
    청주농업학교 학생들과 뜻을 같이하여 독립선언문과 경고문 등을 제작하고 인쇄하는 등 거사준비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었고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신형호가 살았던 당시의 사랑채, 곡간채, 뜰아래채, 마부채는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렸다. 인차리에 있는 유형문화재 14호인 신형호 고가는 고즈넉하다. 지는 가을볕이 오래 머무는 마당은 한가롭다. 오늘도 고가의 하루는 그렇게 느리고 환하게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