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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 혹은 공간매니저 그것이 청년의 일이라면

2022-10-04

문화 문화놀이터


문화예술 소통과 공감의 통로 [ㅊ·ㅂ]
뮤지션 혹은 공간매니저 그것이 청년의 일이라면
'음악문화공간 룸을 운영중인 뮤지션 백인혁'

    백인혁 님은 음악문화공간 '룸'의 공간 매니저이자 뮤지션이다. 현재 밴드 '아이노크', '콰트로 글래시스'로 활동하고 있다. 
뮤지션이 공간을 운영한다면?
    청주에는 그런 공간이 두 곳이 있다. 하나는 로컬뮤지션 공연장 ‘룸’이고 하나는 청년지원공간 ‘청주시 청년꿈제작소’이다. MBTI로 치자면 양극단에서 바라볼 것 같은 두 뮤지션을 각자가 운영하는 공간으로 찾아가 만나보았다. 

 
음악문화공간 '룸'을 운영중인 뮤지션 백인혁. 밴드 '아이노크', '콰트로 글래시스'로 활동하고 있다.


    아마도 청년 뮤지션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 때문일 것이다. 활동을 시작한 지 2-3년 차 정도라고만 생각했던 백인혁 님은 이미 로컬뮤지션 씬에서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활동 연차로는 10년이 훌쩍 넘어가는 프로다.
    청년뮤지션으로서 본인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던 10년, 과연 그는 뮤지션 앞에 붙은 ‘청년’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첫 무대를 기억하시나요?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난 그 주 토요일 청주 시내 성안길에서 첫 버스킹을 했어요. 그때의 시내는 사람들로 미어터질 것이라고 예상한 나름 철저한 계획하에 진행된 야심 찬 무대였죠. 현실은 마이크도 앰프도 없었고 단지 기타와 젬베, 멜로디언과 보컬만 있는 단출한 공연이었지만요.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친구들과 공연 시작 전 함께 기도하고 뒤를 돌아봤는데, 이미 50명 정도의 인원이 공연을 보기 위해 저희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거예요. 엄청난 충격이었죠. 아마 당시에는 버스킹이라는 말도 낯설었던 시기여서 관객들도 저희가 신기했으리라 생각해요. 그때 만약 버스킹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다들 수능 후의 입시 준비로 중요한 시기라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지지를 받기 힘든 상황이었는데도, 꼭 해보고 싶다는 그 마음으로 무대를 만들었으니까요. 



 
첫 무대의 임펙트가 굉장했군요. 지금까지 음악을 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었을까요?
    네, 맞아요. 그렇게 팀을 몇 번 꾸렸었는데 처음에는 ‘거친 형제들’이란 팀을 먼저 했었고요. 그러다 청주의 라이브 카페에서 공연하다가 만난 뮤지션 중에 ‘기린 그린 그림’이라는 팀이 있었어요. 그 팀과 이야기가 맞아서 ‘거친 기린’이라는 팀을 만들고, 이후 ‘거기 밴드’를 결성해서 지역과 홍대에서 간간이 행사와 버스킹을 했었죠. 그러다 각자의 사정으로 2명의 팀원이 이탈했는데, 그때를 기점으로 좀 더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어요. 이름도 ‘윈틀러’로 바꾸고 앨범도 발매했죠. 윈틀러로 활동할 당시 ‘자전거’라는 노래가 그래도 팬분들에게 꽤 사랑을 받은 곡이었어요. 그 당시를 정의한다면 제가 가장 살아있었던 시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타지에서 자취하면서 평일에는 대학 생활을 하고 주말이면 늘 홍대에서 공연했었으니까요. 거의 1년 반 정도를 매주 주말에 서울을 왕복하면서 일요일 밤 10시 공연을 했었어요. 그 시간은 관객이 거의 없는 시간대예요. 1명의 관객을 두고 노래를 부를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1년을 버티니까 반응이 오더라고요. 버스킹을 하면 ‘어? 윈틀러다!’하면서 아는 분도 있으시고 팬덤도 생기고요. 

 
공간 '룸'의 작업실. 촬영팀은 작업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지 요청했다. 백인혁 님은 즉석에서 바로 곡 작업 과정을 보여주었다.

홍대에서 계속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청주로 활동무대를 옮겼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정말 사랑하는 제 주변 사람들은 정작 제 공연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늦게 알았거든요. 제가 청주에서 공연한다면, 그곳도 홍대처럼 멋진 무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청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을 하니 왜 청주에는 볼만한 공연이 없는지, 청주에는 우리와 같은 뮤지션이 왜 없는지 생각해 보게 된 거죠. 홍대에서 공연하던 시절에도 청주에서 행사가 있으면 저는 종종 공연하러 왔었는데 그게 또 괜찮은 수입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청주가 가능성이 있다고 봤어요. 청주라는 도시도 점차 문화 예술적으로 발전하면서 여러 행사나 축제들이 쏟아져 나올 시기였는데 그때 거리 공연이 행사 일부분으로 많이 구성되었죠.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에 그 분야에서는 제가 어느 정도는 독보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에 많이 불려 다녔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마음이 맞는 예술가들을 찾아서 기획팀을 만들어 연극도 올리고 홍대에서 알던 팀들을 불러서 청주에서 같이 공연하는 자체 기획도 시작했죠. 그렇게 활동하던 시기에 문화충동이라는 로컬문화기획사를 만났고 현재는 함께 일하는 사이가 되었고요. 가끔 홍대를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청주에 오지 않았다면 더 큰 후회를 했을 것이라고 말해요.

 
공간 '룸'의 외부와 내부. 도배부터 인테리어 소품까지 공간 곳곳에는 백인혁 님의 손길이 묻어있다.

뮤지션의 활동에서 이제는 공연장인 이곳 룸을 관리하는 운영자의 역할까지 겸하고 계시잖아요. 어느 정도는 직장인의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 등의 힘든 부분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룸은 어차피 예전 ‘열정공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던 시절부터 제가 몸담아 온 공간이기 때문에 제가 해야 하는 일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공간 운영의 책임을 맡고 여타 다른 업무, 예를 들어 서류업무들을 병행하는 것은 제 예상보다 매우 힘들었어요. 낯선 분야이고 이제까지 제가 해왔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역시도 제가 성장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많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했었는데 회기를 마칠 때마다 ‘아직 난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구나’라는 결론을 맞이하거든요. 기획서에는 담지 못하는 수많은 영감적인 교류가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때야말로 예술가의 역할이 굉장히 크게 작용해요. 그리고 그건 정말 제가 예상할 수 없는 범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 그럴 때마다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또 제가 예술가로서 이 분야에서 교육생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는 과정의 연속이에요. 공간운영자로 예술가로 또는 문화예술교육자로 일이 힘에 부칠 때면 늘 저와 일을 함께 했던 대표님의 말이 생각나요. ‘인혁씨와 저는 부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창회 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편의점 벤치에서 나눴던 이 대화가 가치를 좇는 일이 얼마나 매력적일 수 있는지 저에게 확실히 각인시켜줬어요. 그래서 힘들었지만 언제나 저는 행복하게 음악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청년’뮤지션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지역에서 많이 거론되시잖아요. 이런 가치를 좇는 일이 가끔은 버겁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나요?
    공간 운영을 하면서 사실 부담감이 굉장히 컸어요. 제가 청주에서 활동하는 ‘청년’뮤지션 중에서는 그나마 오래된 사람이고, 홍대도 다녀왔고, 앨범도 냈고, 지금은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꼭 잘되어야 한다는 주변의 시선과 기대를 모를 수는 없어요. 그렇기에 저는 철저하게 망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긍정적인 분노죠. 또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떠나 저는 이 공간, 룸이 존재하는 가치는 아주 크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이곳에서 계속해서 음악 활동을 하면서 저의 예술적인 가치를 기록하는 일이 결국 우리를 증명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부담스러운 것은 맞지만 버겁지는 않아요. 이 룸이 백인혁이라는 뮤지션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만큼 음악을 할 것이고, 많이 돌아왔지만 이제는 그 윤곽이 잡혀가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긍정적인 분노를 담아, 스스로 청년을 정의해본다면요?
    어쩌면 저는 어른들이 원하는 그 ‘청년상’에 닿아있을 수 있어요. 도전적이고 열정적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어쩌면 바람직하다고 여기시는 청년상에 말이죠. 그런데 그게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다만 살아온 삶이 그런 것뿐이에요. 그래서 청년의 정의가 힘들지만 한 가지만 꼽는다면 그냥 ‘실행’인 것 같아요. 저희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번듯한 앨범을 낸 것도 실행이었고, 주말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홍대 공연을 다녔던 것도 실행이었어요. 운이 좋아서, 시기가 좋아서 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제가 부딪혀서 실행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죠.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는 다 본인의 선택에 맞는 실행의 결과거든요. 그렇기에 무언가가 되고 싶고 이루고 싶다면 철저하게 실행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