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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휴암골에 깃들다

2023-06-14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휴암골에 깃들다
'글. 최명임'

    휴암골 주인 노릇을 하고 싶은가. 전에 없이 불어난 산까치가 식구를 데리고 마당에서 소란을 피운다. 붙박이로 사는 참새가 개구멍으로 들어와 닭장을 점령했다. 야산 바위에 앉아 놀던 새들이 똥을 깔려놓고 저들의 범법 현장을 고백한다. 아로니아를 훔친 녀석, 복숭아를 생채기 낸 녀석, 사과를 훔친 녀석까지도. 고라니가 예사로 드나들고 뱀이 풀 섶에서, 들개가 돌탑 뒤에서 삐죽이 얼굴을 내민다. 
    휴암동은 청주시 서쪽 변두리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원래 청주군 서강내일하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서에 편입, 1983년 청원군 강서면 일원이 청주시에 편입되면서 휴암리도 청주시에 속하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가포산, 더부실, 둔터, 새텃말, 진약이 있다. 가죽나무배기, 가포산바위, 돌팍재, 석산, 변양짜리, 질퍼니, 따비잔잔등, 줄봉개 등 재미있는 지명이 있어 말만 들어도 정겹다. 구릉지라 임야와 밭이 많고 골짜기를 따라 논이 분포되어 사방에서 시골 냄새가 물씬 난다. 청주의 명물인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휴암동 가운데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옆에는 부모산이 파수꾼처럼 버티고 섰다. 





    서청주에서 가로수 길을 들어서다 좌측 언덕으로 올라가면 내가 사는 휴암골이 나온다. 휴암은 쉴 휴休에 바위 암巖이다. 지명으로 보아도 바위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예전에 바위산이 있어 휴암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고개를 넘던 길손이 바위에 앉아 쉬어가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마을 사람들의 쉼터도 되었겠다. 누군가 무던히 지켜보다 지어낸 이름인 것 같다. 옻샘도 있었다니, 나그네가 반가워 목을 축이고 길을 나섰겠다. 바위산 건너편 휴암골로 흘러온 수맥을 찾아 우리도 샘을 팠다.  
    산에 무성한 잡목을 베어내고 소일거리로 과실나무를 심었다. 우리 부부는 돌과 바위를 주워내느라 애를 먹었는데 생짜배기 땅을 일구느라 땀을 몇 동이나 흘렸다. 대추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 과실나무도 골고루 심었다. 골라낸 돌은 탑을 쌓고 바위는 일일이 자리를 잡아주었다. 산발치에 집터를 닦고 한편에 꽃밭을 만들어 일 년의 반은 이곳에서 보낸다.
    항아리에서 장이 무르익고 무논에서 개구리가 우는 저녁, 가마솥에서 김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면 세상과는 담을 쌓은 자연인이 된다. 사람만 쉬는 곳이 아니다. 지나던 새들도 날개를 접고 바위에 내려앉고 바람도 더불어 놀다가 간다. 전에 없던 산비둘기가 찾아와 터를 닦고 둥지를 틀었다.
    이삿짐을 싣고 여기저기 떠돌 때 정착할 곳이 그리웠다. 갖는 족족 다 놓치고 땅 한 평도 남지 않았을 때 살길이 막막했다. 마음이 감옥에 있으니 보이는 것이 모두 나처럼 갇혀있는 것 같았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쉼터를 찾아다녔다. 쉰다는 것이 사치라 여기며 앞만 보고 걷다가 만난 휴암골,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는 날 가슴이 뻐근했다. 그와 나는 사십 년을 함께 걸어오다 휴암골에 앉아 목을 축이고 여독을 푸는 중이다.
    산다는 것이 어름사니 외줄 타기만큼이나 조마조마하다. 앞으로 나가다 뒤로 물러섰다, 허방다리 짚다가, 여우에 홀린 듯, 한 바퀴 돌며 곡절과 부딪힌다. 한 곡절 넘으면 또 한고비, 한고비 지나면 한 고개, 애가 쌓여 속이 부대끼면 휴암골에 와서 구정물 버리듯 모두 쏟아버린다. 한때 나도 순수 자연이었기에 귀소본능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휴암골의 봄은 총천연색이다. 온갖 생명이 꽃샘바람을 무릅쓰고 저만의 색깔로 봄을 그려놓는다. 바통을 이어받은 여름은 농부의 땀으로 열매를 그려 넣고 명암을 살려 열매마다 햇살과 바람과 빗물도 새겨 넣는다. 땀에 이골이 난 농부의 손끝에서 열매에 깊은 물이 들고 햇살도 익기 시작하면 여름은 저만치 물러난다.  





    가을이 들녘을 비워내고 긴 한숨을 토한다. 새들이 빈 가지에 수수로이 앉았다가 둥지로 돌아간다. 비움의 계절엔 우리 집 누렁이도 털갈이한다. 부스스 몸을 터는 사이 나도 내 안의 그득한 가을을 내려놓는다. 바야흐로 눈꽃이 날리기 시작하면 모든 생명이 숨을 고르고 휴식에 든다. 긴 겨울, 한숨 달게 자고 나와 휴암골 마당을 서성이면 어디선가 봄을 심는 호미질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휴암골은 숱한 생명이 어우러진다. 바위와 나무, 꽃과 바람과 새와 이름도 모르는 작은 생명이 무수히 살고 있다. 그 풍경에 취하면 나도 나무가 되고 꽃이 되고 바람이 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완장을 내려놓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천천히 물들어가고 싶다. 순한 자연물로 돌아가 저들과 어울리는데 부끄럼이 없었으면 좋겠다. 
    고즈넉한 저녁이면 오감이 깨어난다. 휴암골에 앉아 숲이 하는 말, 산새가 하는 말을 즐겨듣고 묵언에 든 바위의 언어를 파보느라 마음을 기울인다. 귀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로 가득 차고 눈은 온통 푸른 물이 그득한 채 바위에 누우면 세상사로 굳은 마음의 각질이 뚝뚝 떨어져 나간다. 
    휴암골 식구들은 아침이면 부리나케 쟁기를 들고 나가 생의 논밭을 갈다가 노을을 등에 지고 쉼터로 돌아간다. 좁은 논둑길로 저벅저벅 돌아오는 늙은 사내와 뒤따르는 지어미의 생의 행로가 푸른 산을 배경으로 한 편의 풍경화가 된다.    
    휴암골에 금빛 노을이 내린다. 황혼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노을빛에 물들어 하느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