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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토끼에 관한 추억

202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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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토끼에 관한 추억
'글. 이정연'

    동무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하교할 때였다. 산길에 어린 산토끼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토끼를 잡으러 뛰어갔다. 아무리 작아도 산토끼라 잽쌌다. 한 참 우리 앞에서 도망치다가 잡목이 우거진 산으로 올라갔다. 다른 친구들은 곧 포기했지만 나는 토끼를 따라 잡목 사이로 뛰어 올라갔다. 싸리나무 같은 작은 잡목이 많아 토끼도 나도 속도가 느려지는데 나는 토끼 옆으로 뛰어 더 빨리 경사가 높은 산으로 올라가 토끼를 낮은 길 쪽으로 내몰았다.
    아버지가 토끼를 잡을 때는 산 위에서 내려오면서 잡아야 한다고 일러 주셨기 때문이다. 토끼는 앞다리가 짧아서 오르막이나 평지에서는 빠른데 내리막길은 곤두박질치면서 잘 도망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실제로 학교에서도 겨울이면 가끔 선생님께서 동무들과 함께 토끼 잡으러 가자고 하시는데 우리는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꽹과리며 도시락을 두들기며 토끼를 쫓으면 잘 달리는 아이들이 내리막길로 내몬 토끼를 잡았기 때문이다.
    토끼는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나는 더 필사적으로 쫓아가서 더디어 마른 풀 더미에 갇힌 어린 토끼를 붙잡았다. 작지만 얼마나 앙칼지게 반항하는지 집으로 가는 내내 내 팔을 할퀴어서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나도 기진해서 토끼를 엄마한테 건네주면서 내가 키울 거니까 토끼집을 마련해 달라고 했더니 엄마는 토끼를 받자마자 이렇게 작은 녀석을 왜 잡았냐며 산으로 놓아주어 버리셨다. 걸음아 날 살리라고 토끼는 재빨리 도망가 버렸다.





    이 토끼를 잡으려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고 팔을 보여 주면서 흙 마당에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엄마는 저 거무튀튀한 산토끼보다 몇 배나 예쁜 하얀 토끼 한 쌍을 사주마고 약속하는 바람에 나는 울음을 그치고 장날을 기다렸다. 다음 장날 엄마는 정말로 새하얀 털이 눈부신 토끼 한 쌍을 사 오셨다. 토끼가 오고 나서 내 일과는 모든 일이 토끼 중심으로 돌아갔다. 내가 그토록 울어서 토끼를 사 왔으니 토끼는 내 책임이라며 엄마는 모든 먹이를 내가 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토끼가 잘 먹는 왕고들빼기 같은 풀을 뜯어 왔다. 정 없을 때는 상추도 주면 잘 먹었고 보리나 밀 같은 걸 주어도 먹었다. 장난감이나 인형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토끼 기르기는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동무들이 놀자고 해도 토끼 보러 가야 한다고 뿌리치고 왔다. 아이들은 은근히 부러워하고 가끔은 우리 집에 와서 보고 가기도 했다. 장날이면 엄마한테 부탁해서 토끼를 팔아 공책도 사고 연필도 사고 왕사탕도 사 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토끼는 맨날 먹고 사랑만 하는 모양이었다. 새끼가 얼마나 잘 불어나는지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도 작아졌는데 서로 싸우고 물어뜯다가 우리를 갉아서 구멍이 생기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당으로 여러 마리가 나와 제멋대로 돌아다니곤 했다. 나는 토끼 먹이 걱정하랴 나온 놈 붙잡아 우리에 넣으랴 매일 코피가 났다.
    더구나 우리가 터질 것 같아서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마땅한 널빤지가 없어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베어와 같은 길이로 자르고 작은 못을 쳐서 우리를 따로 만들기도 했다. 공부는커녕 토끼 때문에 아무것도 못할 지경에 이르자 이번에는 토끼 좀 어떻게 하라고 엄마한테 떼를 썼다. 내가 학교에만 다녀오면 마당에 나와 돌아다니는 토끼 잡으러 다닌다고 부산을 떨자 그게 재미있는지 오빠는 어느 날 카메라를 빌려 와 사진을 찍어 주었다. 반쯤 엉덩이를 내놓고 토끼 뒤를 쫓아가는 것과 헌 가마니 위에 앉아 토끼 몇 마리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 모습도 찍어 주었다. 방학 때 그 사진을 선생님께 편지로 보내주었는데 선생님은 단발머리 어린 소녀와 토끼들이 그 어떤 화보보다 아름답다고 극찬한 답장을 보내 주셨다.





    그러는 중 중학교에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제 나는 토끼에게 관심이 사라지고 내가 가야 할 좀 더 큰 세상에 대한 관심과 기대에 부풀었다. 마음이 떠난 곳에는 곧 황량함만 남았다. 토끼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날마다 모든 것이 궁금하고 설레어서 토끼에게 마음 쓸 여가가 없었다. 내 사춘기와 함께 사라져간 새하얗고 예쁜 토끼들 그 토끼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선 늘 새로이 뭔가가 생겨나고 또 사라진다. 친구가 생기고 상상하지도 않은 일이 나타나 나의 관심을 앗아간다. 그래서 인생이 즐겁기도 하고 안타깝고 슬프기도 하다. 첫사랑으로 가슴이 불로 지지듯이 아프기도 했고 따가운 질시로 세상 그만 살고 싶기도 한 시간의 강물도 부침하면서 건너왔다. 이제 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내 안에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큰 무게 추 같은 중심이 생겼다. 그리고 누군가의 화살을 보면 비켜서서 슬며시 피해 가는 여유도 생겼다. 시간은 내게서 물 흐르듯이 지나갔지만, 결코 허투루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능히 감당할 여유와 사랑과 지난 시간만큼의 어른스러움 같은 것을 남기고 간 것이다. 그 시절 토끼가 내게 어린이에서 소녀로 성장 시켜 준 것처럼 지금의 시간은 또 더 깊은 나로 성숙 시켜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