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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마른하늘에 날벼락

2023-06-14

문화 문화놀이터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엽편소설] 마른하늘에 날벼락
'글. 박순철'

     “언니! 글씨가 하얗게 보인다. 뭐 손쉽게 학점 받는 방법 없을까?”
     “….”
     언니는 한 시간이 넘도록 창밖을 응시하는 중이다. 누구를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 언니의 모습이 처량해 보여 동생 혜영이가 침묵을 깨트렸다. 
     “경식이 오빠 보고 싶다. 못 본 지 근 1년 된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뭐가 보고 싶니?”
     “하긴, 그 오빠도 나처럼 머리가 별로 좋은 것 같진 않았어.”
     “알기는 아는구나. 네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그래서 안 만나는 거야?”
     “그래, 그만두었어.”
     “왜?”
     “그 사람 별 흥미 없어.”
     “그 오빠 진짜 머리 나쁘다. 우리 언니 같은 수재를 배신하다니. 무얼 믿고 그러지?”
     “그만둬라. 어차피 다른 열차를 탄 사람들이니. 내가 이상을 너무 높게 설정했었나 보다.”
     언니의 대학 1년 선배였던 경식 오빠는 유머러스하고 서글서글해서 누구나 호감을 느끼는 학생이었다. 자취방에 놀러 오면 혜영이도 오빠라 부르며 많이 좋아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언니는 아낀 용돈으로 경식을 챙겨주며 죽자사자 따라다녔다. 한동안 그렇게 어울려 다니던 경식 오빠가 다른 여학생을 만나는 장면을 목격한 혜영이는 그 내용을 시시콜콜 언니에게 이야기해 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혜영이의 눈에 그들의 다정한 모습은 그 후에도 자주 보였지만 그러다 말겠지 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언니가 불쌍했다. 자신이 나서서 복수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언니가 참고 있는데 어찌할 수도 없었다. 





     “언니! 나 내일부터 빡세게 공부 한번 해볼까?”
     “그래서?”
     “그래서 내년에 소방공무원 시험 볼 생각이야.”
     “꿈도 야무지다. 누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든?”
     “그럼, 사경을 헤매고 있는 환자를 살려내는 그 살신성인의 거룩한 정신!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다. 뭐 체력은 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고.” 
     “제발 참으세요. ‘꿈과 현실은 항상 동떨어진다’는 사실도 알았으면 좋겠네요.”
     “왜 몰라. ‘꿈은 원대하게!’ 언니는 그런 말 모르는 것 아냐?”
     “그래,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게’란 말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아무튼, 몰라. 나 오늘부터 열공에 들어갈 거니까 절대로 내 공부 방해해지마. 만약 내가 잘못되면 모두 언니 책임이야”
     “이제 협박까지 하는구나. 그래. 알았어. 열심히 해봐”
     혜영이는 다음날부터 정말 열공에 들어갔다. 혹시 작심삼일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동생 혜영이가 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혜영이는 속된말로 깡다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같은 반 남학생을 두들겨 패서 조폭이라는 별명이 붇기도 했고, 한번 마음먹은 것은 기필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로 정평이 나 있기도 했지만, 공부만큼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직 졸업은 서너 달 남았지만, 취업생이 빠진 강의실은 썰렁하기만 했다. 학점 이수도 해야 되고 소방관 시험 준비도 해야 하는 혜영으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선 2급 소방안전관리자 자격증을 취득하면 학점도 얻을 수 있고 소방관 시험에도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에 2급 소방안전관리자 교육을 신청했다. 
     교육 기간은 서른두 시간으로 아주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전에는 교육만 받으면 방화관리자(소방안전관리자)수첩을 교부해 주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교육 후 시험을 봐서 60점 이하는 떨어진다고 하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첫날 교육과목은 소방관계법령이었다. 소방안전협회 교수라고 신분을 밝힌 사람이 강의하는 데 졸음이 오려고 해서 어금니를 깨물고 이겨내느라 무진 애를 썼다.  
     교육 3일 차 되는 날 오전은 기계설비 실습 시간으로 자동화재 탐지 시설을 둘러보고 화재 발생 시 대처 방법 등을 교육하는 시간이어서 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몇몇 남자들은 흥미를 느끼는지 강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혜영에게는 도무지 듣도 보도 못한 단어들이며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오후가 되자 강의실을 야외로 옮겨 화재 대응 및 피난 실무능력 실습 평가와 자동화재 탐지설비 실무능력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소화기 앞에 서 있는 강사의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사람이었다. 
     “아! 경식이 오빠다.”
     그동안 많이 변하진 않았지만, 학생티를 완전히 벗고 노숙한 직장인이 된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전에는 머리를 길게 길러 예술가같이 보였었는데 하이칼라를 한 모습은 샌님 같은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안전소방서에 근무하는 장경식 소방사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여러분이 화재와 맞닥트렸을 때의 응급조치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불이 나면 가까이 있는 소화기를 가지고 초동대처를 해야 합니다. 초기진압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매스컴이나 방송을 통해서 누누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노즐을 잡고 손잡이를 위로 잡아당기면 이산화탄소가 뿜어져 나가게 됩니다.”
     경식은 아직 혜영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강의에만 열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수강생이 70여 명이나 되니 일일이 명단을 살피거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전에는 혜영이가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하얀 액체가 가상 불꽃을 향해 시원하게 날아간다. 
      “지금부터는 여러분이 가상 불난 곳을 향해 소화기를 분사해보겠습니다. 먼저 1번부터 5번까지 나오세요.”
     혜영이는 23번이어서 다섯 번째 조에 편성되었다. 혜영이가 소화기를 들자 그제야 경식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데 여러 사람 앞이어서 자제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자. 가상 불꽃을 향해 정확하게 분사해보세요. 발사!”
     강사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상 불꽃을 향해 소화기를 분사하던 혜영이가 비틀하더니 옆으로 넘어지면서 하얀 액체가 경식의 얼굴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영문도 모르고 서 있던 경식은 피할 겨를도 없이 고스란히 액체를 덮어써야 했다. 그 모습은 마치 북극곰이 눈 쌓인 하얀 벌판에서 앞발을 들고 서 있는 듯 보였다. 
     “오빠!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하 하 하”
     “호 호 호”
     그 우스꽝스런 모습에 몰려든 수강생들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함박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