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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하귤 예찬

202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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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하귤 예찬
'글. 이정연'

    서귀포 지인의 집에 하귤 나무가 있다. 그리 크지 않은 나무인데 샛노란 하귤을 잔뜩 열고 남쪽 바다 거친 바람에도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고 달려 있다.  하귤은 여름에 먹는 귤이라고 하귤이라 한다고 했다. 감귤 같은데 단단하고 크기는 작은 호박처럼 크다. 제주 사람들은 하귤이 너무 시고 쓴맛이 난다고 따서 버린다고 했다. 그럼 뭐하러 하귤나무를 심느냐고 했더니 두말없이 관상용이라고 한다. 
정말 그랬다.
    구멍이 숭숭 뚫린 까만 담장 그 너머 큼지막한 하귤이 주렁주렁 달린 집을 보면 먹지 않아도 맛있고 어쩐지 풍성한 느낌이 든다. 그 집의 주인이 누군가 궁금하고 친해 보고 싶다. 언젠가 꼭 한 번은 제주의 그런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 하귤나무가 없는 집은 제주 같지 않다. 내 고향 어느 집에 감나무가 없는 것처럼 허전하다.



    지난해 3월 제주에 갔을 때 그 하귤을 여러 개 얻어 왔다. 큰 접시에 담아서 식탁에 두었더니 향기가 참 좋았다. 새콤달콤한 귤 향기 외에 남은 향이 여러 향수에 두루 쓰이는 무스크 향 비슷했다. 나갔다 집에 들어와 현관문을 열면 향기가 거실 가득 퍼져 절로 피로가 가셨다.
    하나 잘라서 먹어보니 과연 듣던 대로 너무 시고 조금 달다. 또 끝 맛은 약간 쓴맛이어서 과일로 그냥 먹기엔 부담스러웠다. 기왕 자른 거 식초 대용으로 쓰면 좋겠다 싶어 살짝 데친 미나리 무침에 속껍질을 벗겨 과육째 넣어 보았다. 새콤달콤 아싹 이건 세상에는 없는 천상의 맛이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먹나 인터넷으로 살펴보니 신맛이 당기는 임산부가 더러 먹고 속껍질까지 벗겨서 설탕에 재워 하귤청을 만든다고 한다. 또 주스로 만들어 얼렸다가 탄산수를 부어 에이드도 만드는데 시원한 여름 산뜻하게 더위를 날려 준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나는 이유없이 기운이 없고 먹은 것도 없는데 자꾸 속이 메슥거렸다. 충격적인 뉴스도 심드렁하고 돈이 산처럼 쌓여있다고 해도 아무것도 사고 싶은 것도 없다. 그저 세상은 저 멀리 나와 상관없는 다른 세계처럼 느껴지며 한없이 가라앉았다.백약이 무효, 당연히 식욕도 떨어져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시원한 물김치가 있으면 한 번 맛보면 어쩌면 달아난 식욕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익지 않은 물김치 한 수저 떠보았는데 다른 것보다 조금 나을 뿐 달아난 내 입맛을 돌아오게 하지는 못했다. 새콤하게 익은 물김치 생각이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방금 발라서 꿀에 재워 두었던 하귤 과육을 좀 갈아서 물김치에 넣고 한 수저 떠보았더니 온몸의 세포가 다 깨어나는 느낌이다. 물김치는 딱 알맞게 익어 자연스러운 신맛과 단맛의 환상적으로 조화를 이뤘다. 기사회생할 맛이라고 할까.



    오늘 마지막 하나 남은 하귤을 깠다. 밑동이 약간 변색하여 더 두면 썩을 것 같았다. 지난 3월 제주에서 가져왔으니까 거의 두 달 가까이 되었는데도 밭에서 금방 땄을 때처럼 신선한 과즙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이런 과일이 다 있다니…….
    그냥 먹으면 정신이 번쩍 나고 다른 음식과 궁함도 좋은 하귤, 이런 하귤이 하도 맛있어 이번에 제주 갔을 때도 하귤을 많이 따왔다. 내가 하도 맛있다며 돌아가면 하귤예찬이라는 글을 하나 쓰고 싶다고 하지 지인은 시디신 하귤이 뭐가 맛있다고 하면서 쓰기만 하면 즉각 반박 글을 쓸 거라고 웃었다. 그보다 맛있는 과일 천지인 제주 사람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하귤청으로 만들려고 겉껍질을 벗긴다. 먼저 칼로 겉껍질 벗긴 하귤 조각 안 부분 가장자리를 가위로 살짝 자르고 벗기면 잘 벗겨진다. 투명한 껍질을 벗기면 탱글탱글 과육 입자가 터질 듯이 가득 차 있다. 재미있다. 마지막 남은 하나 여인의 슬립을 벗길 때처럼. 언제 경험해 봤어요? 태클 걸지 마시라. 경험하는 기쁨이 있으면 상상하는 기쁨도 있다. 더 높게 더 깊게 더 넓게, 상상에는 한계가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나쁜 남자에 서서히 중독되는 여자처럼 하귤에 끌린다. 입안 가득 퍼지는 신맛, 그 진저리칠 맛의 여운에 나도 몰래 슬그머니 또 손이 간다. 접시에 하귤을 수북이 까놓고 아이한테 한번 먹어보라고 했더니 장난인가 싶어 그런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남편이 하나 집어 먹고는 나처럼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하는 말이 이상하다. “많이 시긴 해도 아주 못 먹을 맛은 아닌데? 거 참 묘하게 끌리네!” 하며 또 한 조각을 집는다. 
    그렇다. 하귤은 인생의 쓴맛 단맛 신맛까지 느껴본 사람들이 ‘맞아 이 다양한 맛은 마치 우리의 인생의 맛과 같은 걸’ 하는 마음으로 먹을 줄 아는 사람들만 먹는지 모른다. 이런 쓰임새 많은 하귤이 냉대를 받는 게 안타깝다. 이제 ‘하귤 시어서 못 먹어요.’ 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또한, 이렇게 따로 맛을 낼 데도 있고 쓰임새 많은 하귤이 그만큼 제대로 대접받기를 바란다. 감귤나무는 막 꽃이 피어서 향기를 흩뿌리는데 아직도 작년의 열매를 매단 채로 꽃 피우지 못하는 하귤나무를 보는 건 고문이다. 참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이웃 언니가 속절없이 혼기를 놓치는 걸 보는 기분이다. 더는 제주에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무릇 나무는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매달고 사람들에게 따먹히고 그래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하귤 예찬’이란 제목은 잘못되었다 ‘하귤 중독’으로 써야 제대로일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