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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2부

2024-09-12

문화 문화놀이터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2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3-2.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청주나성의 실체는 아직 명확하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고려 초기에 개경의 나성보다 먼저 축조되었다는 사실이고, 그 위치는 지금의 청주시내 중심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후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조선 후기 「청주읍성도」에 보이는 청주읍성으로 변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발굴조사 등을 통하여 두고두고 풀어나가야 할 연구과제이다. 
    고려 태조가 청주나성을 축조하였다는 기록 이후 이 나성에 대한 기록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청주성 또는 청주산성의 기록들이 간혹 보인다. 1135년(인종 14) 6월에 평지에서 물이 솟아 가옥 180채가 물에 떠내려갔고, 1191년(명종 21) 8월에 민가가 장마로 떠내려가고 묻힌 일 등의 큰 수해를 당한 기록이 있다. 1362년(공민왕 11) 9월에 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하여 청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 무지개가 동쪽에서 솟아 왕궁의 양쪽에 걸쳤는데, 청주 내성(內城)을 넘지 않았다 하고, 이어 10월에 청주성 안에 장마로 물이 불어 죽은 뱀이 떠다니고, 달팽이가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는 등 기후가 마치 여름과 같았다고 한다.  

 
청남문(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그리고 전술한 바와 같이 1390년(공양왕 2) 5월에 장마 폭우로 냇물이 넘쳐 청주읍성의 남문을 치고 들어와 북문에 부딪쳐 성안에 물이 한 길이나 되고 관아와 민가가 떠내려가 거의 다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주역사상 최대의 물난리가 있었던 것으로 이때가 바로 이색 등이 청주 옥에 갇혔을 때로 옥관들이 급히 물을 피해 압각수에 올라가서 죽음을 모면하였다는 일화가 기록에 전한다. 이러한 기록들에서 주목되는 점은 청주읍성과 청주 내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는 청주읍성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조선 초기의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 “읍석성(邑石城)은 둘레가 1,084보이고, 안에 우물 13곳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청주읍성의 실체에 대한 첫 공식기록이며, 둘레와 우물의 수 등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성종실록』에는 처음으로 청주읍성의 축조기사가 나온다. 1487년(성종 18) 2월 19일에 사헌부의 관리가 ‘청주의 축성은 급한 일이 아니며, 이제 듣자하니 습석군(拾石軍)이 밀과 보리를 밟아버린다 하오니 우선 중지하였다가 가을을 기다려서 쌓게 하소서…’라고 고하니, 왕이 ‘청주에 축성하는 일은 가을을 기다려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명하였다. 이로써 1487년 가을에 청주읍성을 개축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습석군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석성으로 축조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로부터 7년 후 1494년(성종 25) 2월에 축조한지 5년이 지나도록 무너지지 않았을 경우에 성을 축조한 감독관에게 벼슬 등급을 올려준다는 규정에 의해 감독자들에 대한 포상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청주읍성은 높이가 낮고 작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2개월 후인 4월 13일의 기록에는 청주목사 김숙연(金叔演)이 쌓는 것을 감독한 곳은 기한 안에 퇴락하였다는 기록이 보여 일부 무너진 부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부실공사라기보다는 당시 성벽이 무너지는 일은 다반사였음을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에도 청주지역에 몇 차례의 수해가 있었으며 그 때마다 청주읍성도 피해를 입었다. 1547년(명종 2) 6월 24일에 충청감사 김익수(金益壽)는 청주 남문 밖의 내가 넘쳐 읍내의 인가가 거의 다 물에 잠겨 석교(石橋) 30여 칸이 무너지고, 민가 16가구가 휩쓸려 떠내려갔다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여기서 석교는 곧 남석교이다. 남석교는 1723년(경종 3)에 대홍수로 다리 3칸이 떠내려가자 청주목사 최상정(崔尙鼎)이 옛 모습대로 보수한 바 있고, 정조 19년(1795)에도 목사 안정탁(安廷鐸)이 개건한 기록이 보인다. 남석교가 떠내려갈 정도의 수해였다면 인명피해와 함께 청주읍성도 피해를 보지 않았을까 추측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일성록』에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에 충청병사 구세적(具世勣)이 청주읍성을 보수한 결과를 보고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때 성의 높이는 주척으로 23척, 둘레는 1,489보라 하였으니, 이를 환산하면 높이는 높은 곳이 약 479㎝, 낮은 곳이 약 375㎝에 이르며, 둘레는 약 1.86㎞이다. 하지만 용척의 차이와 성의 둘레를 재는 기준의 차이로 계산이 약간 다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084보, 『성종실록』에는 5,443척,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3,648척, 『여지도서』에는 1,109장반(丈半), 『증보문헌비고』에는 1,427보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측조사 결과 약 1,773m로 조사된 바 있다. 주요 시설은 성문이 4곳, 옹성이 2곳, 우물이 13곳, 성가퀴가 566타 내지 591타이고, 포루는 8곳이 있었으나 퇴락하여 2개의 치성만 남아 있으며, 서ㆍ남ㆍ북의 3문은 홍예문에 문루를 갖추었지만 동문은 홍예와 문루가 없다고 되어 있다. 
    전남 구례의 문화유씨 종가인 운조루(雲鳥樓)에 소장된 『여지도(輿地圖)』라는 지도첩 속에 포함되어 있는 「청주읍성도」에는 읍성 내외의 각종 시설과 건물 명칭이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지금의 청주시 임시청사 지리에 있던 청주목 관아는 동헌·내아·객사의 3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관아의 중심인 동헌에는 내아의 중앙에 있는 외삼문을 거쳐 왼쪽으로 돌아 동향한 내삼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었으며, 내삼문 남쪽에 남향한 집사청(執事廳)이 있었다. 그 뒤로 ㄴ자형의 부속건물이 배치되고, 동헌 동쪽에는 작은 연당(?堂)이 마련되어 있었다. 내아는 역시 남향한 본채와 3,4채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헌 서쪽에 별도로 마련된 객사의 명칭은 서원관(西原館)이었는데, 남쪽에 외삼문과 내삼문을 갖추어 이를 정문으로 이용하였고, 동헌에서도 협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객사의 형태는 문의문화재단지에 있는 문산관(文山館)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객사의 동쪽에는 망선루(望仙樓)가 있었고, 내아의 뒤에서 동쪽으로 난 문이 있었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