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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비 오시는 날
202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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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비 오시는 날
'글. 최명임'
가만히, 가만히 꽃비가 오신다. 초가지붕 성긴 볏짚 사이로 스며들던 유년 어느 날의 비인 성싶어서 반갑다. 긴 세월 윤회하여 지금 내 앞에 뛰어내린다. 정겨워서 손바닥에 받아 냄새를 맡아본다. 시절도 사람도 변한 지금에 찾아와도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심성은 퍽 깊어진 듯하다. 나의 속이 그때보다 더 깊어졌거나.
장마가 시작되었다. 일갈하는 우레비에 간담이 서늘하다. 속살거리는 는개와 건들비와 바람비와 보름치와 산돌림, 안개비 꽃비 먼지잼. 비의 다양한 속성을 파 본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시인의 가슴에다 방망이질한다지.
나도 시인이 되어 한 편의 시를 쓰고 싶다. 내 감성이 저 물결비를 타고 촉촉한 어휘로 쏟아내는 시 한 구절, 후줄근히 가슴이 젖도록 글을 쓰고 싶다. 갈망이 빗줄기를 타고 오르내리다 한숨으로 주저앉는다. 시는 아무나 쓰나. 내 가난한 단어의 조합으로 넘볼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그래도 난 감당할 수 없는 저 수만 가지 언어가 빗줄기를 타고 오면 마음에 모두 담으려고 애쓴다. 어느 맑은 날 조잘대는 참새처럼 반짝이는 언어로 나만의 것을 만들어보려고.
비가 오시는 날은 이유도 없이, 대상도 없이 상사병을 앓는다. 비를 담아 긴 운문 한 편 쓰고 나면 마음의 몸살이 달아날 것 같아서 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빗줄기를 붙잡고 무작정 집을 나선다. 내 사랑을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몸과 마음을 굴리고 다닌다.
비가 좋다. 더 담백한 언어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였다. 레인부츠를 신을 수가 있어서 비가 좋다고. 툭, 투둑, 투두둑~ 빗소리가 듣기 좋아서, 비 냄새가 좋아서라고 말한다. 고도원의 아침편지에는 나무의 먼지와 거리의 먼지를, 마음의 먼지를 모두 씻어내려 하천으로 냅다 쏟아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시인의 감성을 지닌 저 모두들 한편의 시로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공감할 대상이 절절히 필요한 누군가는 시인으로 태어날 터.
비가 좋은 이유를 갖다 대지만 나는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성에 차지 않는다. 굳이 갖다 붙여야 한다면 내 몸을 차지한 7할의 물이 자석처럼 이끌려서 소통하는 기쁨이 아닐까 한다.
비는 가당찮은 모습으로 날 배신할 때도 있다. 다중인격을 가진 듯 올 때마다 나를 홀렸지만, 배신감에 치를 떨며 저만치 뒷걸음칠 때도 있었다.
유년으로 되돌아간다. 우리 집 뒤에 생겨 난 저수지는 무척이나 넓고 깊었다. 맑은 날에는 아이들이 양수 위에서 놀던 기억을 더듬어 무한히도 그 물을 즐겼다. 입술이 파래지면 볕에 옹기종기 모여 앉거나 돌밭에 누워 몸을 말리고 다시 첨벙거리며 한여름을 물에서 살았다. 어른들도 물속에 들어서면 태동하는 아이처럼 둥실거리며 놀았다. 본디 물은 모든 생명의 초석이 아니었는가.
장맛비가 넘치도록 내리고 간 뒷날 그 물이 아이를 삼켜버렸다. 최악의 상황을 보며 큰물은 평생 두려움으로 남아버렸다. 눈만 뜨면 저수지가 보이는데 한동안 배신감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동네 아지매는 그 자리에 아이의 혼이 남아서 또 누군가를 붙들어갈지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도 내리 장마 속이다. 바람비에 이끌려 무심천변으로 나섰다. 어디서 일어난 물방울 하나가 저리도 크고 무서운 세계를 이루었을까. 저 거센 물은 멈추어 서는 법을 모른다. 거슬러 오를 줄도 모른다. 무섭게 들이닥치더니 수위가 높아지고 둑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물길을 살핀다. 오로지 앞만 보고 내달리는 길에 감당 못 할 오류를 범한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기에…. 목적지는 있는 것일까. 저 거대한 수객이 목적도 야망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을 리는 만무하다. 성에 차도록 세상의 쓰레기를 몰아내고 나면 자정작용을 한 물은 어느새 고요한 제 속살을 비출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든다. 먹잇감을 위협하는 짐승의 포효인 듯 하늘의 일갈 대성인 듯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려다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흐르는 물이 내 속을 훑고 지난 듯 속이 뻥 뚫린 것 같다. 세상 오물 다 걷어가는 것 같아서 후련함도 든다. 필경 내일은 한 꺼풀 때 벗겨진 하늘에서 금빛 해가 떠오르겠다.
장맛비의 끝물일까. 꽃비가 나를 유혹한다. 아름다운 물 본연의 모습이다. 내가 알던 그네들의 땀방울 내음이 난다. 꺼이꺼이 누군가의 슬픈 눈물도 섞여 있는 듯. 지난해 소리 없이 밤새도록 내리던 눈도 어느 그해 억수비도 섞여 있는 듯하다. 우주를 돌고 돌아와 내리는 비, 꽃비에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 든다. 앞마당 봉선화 꽃잎에 또록또록 떨어진 비꽃은 벌써 바람의 섬섬옥수를 잡고 떠났으리라. 다시 내게로 올 때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비가 되어 세상으로 흘러들고 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일갈하는 우레비에 간담이 서늘하다. 속살거리는 는개와 건들비와 바람비와 보름치와 산돌림, 안개비 꽃비 먼지잼. 비의 다양한 속성을 파 본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시인의 가슴에다 방망이질한다지.
나도 시인이 되어 한 편의 시를 쓰고 싶다. 내 감성이 저 물결비를 타고 촉촉한 어휘로 쏟아내는 시 한 구절, 후줄근히 가슴이 젖도록 글을 쓰고 싶다. 갈망이 빗줄기를 타고 오르내리다 한숨으로 주저앉는다. 시는 아무나 쓰나. 내 가난한 단어의 조합으로 넘볼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그래도 난 감당할 수 없는 저 수만 가지 언어가 빗줄기를 타고 오면 마음에 모두 담으려고 애쓴다. 어느 맑은 날 조잘대는 참새처럼 반짝이는 언어로 나만의 것을 만들어보려고.
비가 오시는 날은 이유도 없이, 대상도 없이 상사병을 앓는다. 비를 담아 긴 운문 한 편 쓰고 나면 마음의 몸살이 달아날 것 같아서 펜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빗줄기를 붙잡고 무작정 집을 나선다. 내 사랑을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몸과 마음을 굴리고 다닌다.
비가 좋다. 더 담백한 언어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였다. 레인부츠를 신을 수가 있어서 비가 좋다고. 툭, 투둑, 투두둑~ 빗소리가 듣기 좋아서, 비 냄새가 좋아서라고 말한다. 고도원의 아침편지에는 나무의 먼지와 거리의 먼지를, 마음의 먼지를 모두 씻어내려 하천으로 냅다 쏟아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시인의 감성을 지닌 저 모두들 한편의 시로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공감할 대상이 절절히 필요한 누군가는 시인으로 태어날 터.
비가 좋은 이유를 갖다 대지만 나는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성에 차지 않는다. 굳이 갖다 붙여야 한다면 내 몸을 차지한 7할의 물이 자석처럼 이끌려서 소통하는 기쁨이 아닐까 한다.
비는 가당찮은 모습으로 날 배신할 때도 있다. 다중인격을 가진 듯 올 때마다 나를 홀렸지만, 배신감에 치를 떨며 저만치 뒷걸음칠 때도 있었다.
유년으로 되돌아간다. 우리 집 뒤에 생겨 난 저수지는 무척이나 넓고 깊었다. 맑은 날에는 아이들이 양수 위에서 놀던 기억을 더듬어 무한히도 그 물을 즐겼다. 입술이 파래지면 볕에 옹기종기 모여 앉거나 돌밭에 누워 몸을 말리고 다시 첨벙거리며 한여름을 물에서 살았다. 어른들도 물속에 들어서면 태동하는 아이처럼 둥실거리며 놀았다. 본디 물은 모든 생명의 초석이 아니었는가.
장맛비가 넘치도록 내리고 간 뒷날 그 물이 아이를 삼켜버렸다. 최악의 상황을 보며 큰물은 평생 두려움으로 남아버렸다. 눈만 뜨면 저수지가 보이는데 한동안 배신감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동네 아지매는 그 자리에 아이의 혼이 남아서 또 누군가를 붙들어갈지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다음 해도 그다음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도 내리 장마 속이다. 바람비에 이끌려 무심천변으로 나섰다. 어디서 일어난 물방울 하나가 저리도 크고 무서운 세계를 이루었을까. 저 거센 물은 멈추어 서는 법을 모른다. 거슬러 오를 줄도 모른다. 무섭게 들이닥치더니 수위가 높아지고 둑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물길을 살핀다. 오로지 앞만 보고 내달리는 길에 감당 못 할 오류를 범한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기에…. 목적지는 있는 것일까. 저 거대한 수객이 목적도 야망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을 리는 만무하다. 성에 차도록 세상의 쓰레기를 몰아내고 나면 자정작용을 한 물은 어느새 고요한 제 속살을 비출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든다. 먹잇감을 위협하는 짐승의 포효인 듯 하늘의 일갈 대성인 듯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려다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흐르는 물이 내 속을 훑고 지난 듯 속이 뻥 뚫린 것 같다. 세상 오물 다 걷어가는 것 같아서 후련함도 든다. 필경 내일은 한 꺼풀 때 벗겨진 하늘에서 금빛 해가 떠오르겠다.
장맛비의 끝물일까. 꽃비가 나를 유혹한다. 아름다운 물 본연의 모습이다. 내가 알던 그네들의 땀방울 내음이 난다. 꺼이꺼이 누군가의 슬픈 눈물도 섞여 있는 듯. 지난해 소리 없이 밤새도록 내리던 눈도 어느 그해 억수비도 섞여 있는 듯하다. 우주를 돌고 돌아와 내리는 비, 꽃비에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 든다. 앞마당 봉선화 꽃잎에 또록또록 떨어진 비꽃은 벌써 바람의 섬섬옥수를 잡고 떠났으리라. 다시 내게로 올 때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비가 되어 세상으로 흘러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