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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1부
2024-09-05
문화 문화놀이터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1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3-1.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청주 역사의 중심 무대였으며 지금도 청주시민이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가끔은 찾게 되는 곳이 원도심의 성안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옛날의 자취가 하나 둘씩 사라져 눈여겨보지 않으면 역사의 중심지였음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한번쯤은 둘러볼만한 유적들이 남아 있어 한 바퀴 돌고나면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예전보다는 못하다지만 그래도 청주의 중심상업지역임에 틀림이 없고 그곳에 가면 젊음과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현재 청주시 임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청원군청 자리는 조선시대 청주목관아의 옛터로서 청주동헌이 현존하고, 중앙공원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과 망선루 등 제법 많은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국보 제41호 용두사지철당간을 비롯하여 옛날이야기를 품고 있는 유적과 유물들이 곳곳에 자리하여 발길을 멈추게 한다. 관아를 중심으로 일정한 방향에 설치하여 지방 수령이 관할하던 3단1묘 중 문묘, 사직단, 성황당 옛터가 있고, 오늘날의 행정중심인 충청북도청과 청주시청이 있으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석교동 육거리시장에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남석교가 땅속에 묻혀있다.
성안길 일대를 청주의 원도심이라 부르는 이유는 청주읍성이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 그 안에 행정의 중심기구인 청주목 관아와 함께 충청도 육군본부라 할 수 있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주읍성은 곧 청주의 정체성이며 성안길의 역사적 배경이다. 청주읍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 어떠한 형태였는지? 최소한의 역사와 당시 저잣거리 모습을 알려주는 문헌기록은 소략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는 표현이 맞다. 조선의 왕조실록에 단편적인 내용이 보이고, 각종 지리지에 읍성의 존재사실 정도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과정 또한 명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려와 조선시대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짤막한 기록과 고지도들이 보이고, 최근에 발굴된 고고학 자료에 의해서 실체를 조금씩 파악하고 있는 정도이다. 나는 역사학 전공자로서 특히 성곽에 학문적 호기심을 갖고 박사논문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대개의 학자들이 등한시하는 지역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1990년대부터 지역의 문화단체에서 간행하는 책자 등에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청주읍성에 대한 글을 몇 차례 썼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호기심의 발로였고, 주위에서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유지경성(有志竟成)이라 했던가! 뜻이 있으면 이루어지기도 한다. 2000년도에 청주시의 지원을 받아 청주읍성에 대한 종합적인 학술조사를 실시하는 한편으로 시민을 상대로 강의할 때마다 청주지역에서 읍성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역설하였고, 아울러 가능한 부분이라도 상징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메아리 없는 작은 외침에 불과하였지만, 점차 청주의 정체성과 문화원형의 회복이라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역사에 이해가 깊었던 단체장들의 후원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2013년에는 ‘성돌모으기운동’을 전개한 후 그 결과로 40m라는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성벽의 일부를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읍성의 성벽이 지나가던 곳이 지금은 대부분 도로가 되어 있으므로 이 부분에 읍성을 알릴 수 있는 상징물을 설치하자는 의견과, 도로에 성돌을 깔아 읍성의 존재와 위치를 표시하자는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이렇게 읍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매년 9월 첫 주말에 청주읍성 축제를 개최하면서 읍성복원을 열망하고 있으니,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관심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성과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청주 성안길과 성벽 둘레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청주읍성도와 중요 건물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청동으로 제작하여 길바닥에 설치한 것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언젠가는 머릿돌이 되리라 믿는다.
2011년 이후 청주읍성과 관련된 발굴조사가 몇 차례 있었다. 시청에서 발주하는 정식 학술조사 외에 읍성 주변에서 건물신축 또는 개축 신청이 들어오면 반드시 발굴조사를 선행하도록 하여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또한, 성벽이나 우물과 같은 일부의 유구는 그 자리에 전시하도록 하여 읍성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읍성을 알리는 표석이 되기도 한다.
청주읍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성종 18년(1487) 2월에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의 완공은 개축 또는 보수를 마쳤다는 것이지 처음 축조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목은 이색(李穡) 등이 모함을 받아 청주감옥에 갇혔을 때 마침 폭우가 내려서 고을 앞 내가 흘러넘쳐 읍성의 남문이 파괴되고 곧 북문에 이르러 성내의 물 깊이가 한 길이 넘었다는 『고려사』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에 이미 읍성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신라시대에도 청주에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에는 685년(신라 신문왕 5) 3월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고, 689년(신문왕 9) 윤9월 26일에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던 기록이 있어 청주읍성의 전신은 통일신라시대에 9주5소경의 지방제도를 갖추던 신문왕대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열전 열기(裂起)편에는 신라 문무왕대(661~681)에 김유신의 맏아들 삼광(三光)이 집정하였을 때 열기가 오늘날의 보은인 삼년산군의 태수가 되었고, 그와 함께 김유신을 보좌하던 구근(仇近)은 김유신의 셋째 아들 원정(元貞)을 따라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서원경성과 서원술성이 동일한 성인지 별개의 성인지 단언할 수는 없으나, 당시 지금의 성안길 주변에는 용두사(龍頭寺)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위치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할 때 서원경성은 대체로 지금의 우암산성이나 상당산성이 아닐까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 청주읍성이 지금의 청주중심가에 존재한 사실이 보다 명확하게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930년(태조 13년) 8월 12일에 태조 왕건이 청주에 행차하여 나성(羅城)을 축조하였다. 청주에 나성을 축조하였다는 것은 청주의 역사와 청주읍성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나성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성곽제도로서 도시 전체를 감싸고 쌓은 성곽을 말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나성을 축조한 것은 고구려의 장안성과 백제의 사비성, 고려의 왕도 개경성과 조선의 한양성이 있었다. 이밖에 몽고의 침입 때 피란처로 천도하였던 강화도성과 삼별초가 진도에 세운 용장성 등이 나성의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한 왕조의 도성이었거나 또는 일시적으로 도성 역할을 하였던 곳을 제외하고 나성을 축조한 곳은 청주가 유일하다. 청주나성의 실체는 아직 명확하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고려 초기에 개경의 나성보다 먼저 축조되었다는 사실이고, 그 위치는 지금의 청주시내 중심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후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조선 후기 「청주읍성도」에 보이는 청주읍성으로 변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발굴조사 등을 통하여 두고두고 풀어나가야 할 연구과제이다. <2부에서 계속>
Cheapter3-1. 되찾은 그 이름,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
청주 역사의 중심 무대였으며 지금도 청주시민이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가끔은 찾게 되는 곳이 원도심의 성안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옛날의 자취가 하나 둘씩 사라져 눈여겨보지 않으면 역사의 중심지였음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한번쯤은 둘러볼만한 유적들이 남아 있어 한 바퀴 돌고나면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예전보다는 못하다지만 그래도 청주의 중심상업지역임에 틀림이 없고 그곳에 가면 젊음과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현재 청주시 임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청원군청 자리는 조선시대 청주목관아의 옛터로서 청주동헌이 현존하고, 중앙공원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과 망선루 등 제법 많은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국보 제41호 용두사지철당간을 비롯하여 옛날이야기를 품고 있는 유적과 유물들이 곳곳에 자리하여 발길을 멈추게 한다. 관아를 중심으로 일정한 방향에 설치하여 지방 수령이 관할하던 3단1묘 중 문묘, 사직단, 성황당 옛터가 있고, 오늘날의 행정중심인 충청북도청과 청주시청이 있으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석교동 육거리시장에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남석교가 땅속에 묻혀있다.
성안길 일대를 청주의 원도심이라 부르는 이유는 청주읍성이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 그 안에 행정의 중심기구인 청주목 관아와 함께 충청도 육군본부라 할 수 있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주읍성은 곧 청주의 정체성이며 성안길의 역사적 배경이다. 청주읍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 어떠한 형태였는지? 최소한의 역사와 당시 저잣거리 모습을 알려주는 문헌기록은 소략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는 표현이 맞다. 조선의 왕조실록에 단편적인 내용이 보이고, 각종 지리지에 읍성의 존재사실 정도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과정 또한 명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려와 조선시대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짤막한 기록과 고지도들이 보이고, 최근에 발굴된 고고학 자료에 의해서 실체를 조금씩 파악하고 있는 정도이다. 나는 역사학 전공자로서 특히 성곽에 학문적 호기심을 갖고 박사논문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대개의 학자들이 등한시하는 지역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1990년대부터 지역의 문화단체에서 간행하는 책자 등에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청주읍성에 대한 글을 몇 차례 썼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호기심의 발로였고, 주위에서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유지경성(有志竟成)이라 했던가! 뜻이 있으면 이루어지기도 한다. 2000년도에 청주시의 지원을 받아 청주읍성에 대한 종합적인 학술조사를 실시하는 한편으로 시민을 상대로 강의할 때마다 청주지역에서 읍성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역설하였고, 아울러 가능한 부분이라도 상징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처음에는 메아리 없는 작은 외침에 불과하였지만, 점차 청주의 정체성과 문화원형의 회복이라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역사에 이해가 깊었던 단체장들의 후원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2013년에는 ‘성돌모으기운동’을 전개한 후 그 결과로 40m라는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성벽의 일부를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읍성의 성벽이 지나가던 곳이 지금은 대부분 도로가 되어 있으므로 이 부분에 읍성을 알릴 수 있는 상징물을 설치하자는 의견과, 도로에 성돌을 깔아 읍성의 존재와 위치를 표시하자는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이렇게 읍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매년 9월 첫 주말에 청주읍성 축제를 개최하면서 읍성복원을 열망하고 있으니, 언제 실현될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관심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성과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청주 성안길과 성벽 둘레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청주읍성도와 중요 건물터를 알리는 표지판을 청동으로 제작하여 길바닥에 설치한 것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이 언젠가는 머릿돌이 되리라 믿는다.
2011년 이후 청주읍성과 관련된 발굴조사가 몇 차례 있었다. 시청에서 발주하는 정식 학술조사 외에 읍성 주변에서 건물신축 또는 개축 신청이 들어오면 반드시 발굴조사를 선행하도록 하여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또한, 성벽이나 우물과 같은 일부의 유구는 그 자리에 전시하도록 하여 읍성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읍성을 알리는 표석이 되기도 한다.
청주읍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성종 18년(1487) 2월에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의 완공은 개축 또는 보수를 마쳤다는 것이지 처음 축조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목은 이색(李穡) 등이 모함을 받아 청주감옥에 갇혔을 때 마침 폭우가 내려서 고을 앞 내가 흘러넘쳐 읍성의 남문이 파괴되고 곧 북문에 이르러 성내의 물 깊이가 한 길이 넘었다는 『고려사』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에 이미 읍성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신라시대에도 청주에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에는 685년(신라 신문왕 5) 3월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고, 689년(신문왕 9) 윤9월 26일에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던 기록이 있어 청주읍성의 전신은 통일신라시대에 9주5소경의 지방제도를 갖추던 신문왕대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열전 열기(裂起)편에는 신라 문무왕대(661~681)에 김유신의 맏아들 삼광(三光)이 집정하였을 때 열기가 오늘날의 보은인 삼년산군의 태수가 되었고, 그와 함께 김유신을 보좌하던 구근(仇近)은 김유신의 셋째 아들 원정(元貞)을 따라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서원경성과 서원술성이 동일한 성인지 별개의 성인지 단언할 수는 없으나, 당시 지금의 성안길 주변에는 용두사(龍頭寺)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위치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할 때 서원경성은 대체로 지금의 우암산성이나 상당산성이 아닐까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 청주읍성이 지금의 청주중심가에 존재한 사실이 보다 명확하게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930년(태조 13년) 8월 12일에 태조 왕건이 청주에 행차하여 나성(羅城)을 축조하였다. 청주에 나성을 축조하였다는 것은 청주의 역사와 청주읍성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나성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성곽제도로서 도시 전체를 감싸고 쌓은 성곽을 말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나성을 축조한 것은 고구려의 장안성과 백제의 사비성, 고려의 왕도 개경성과 조선의 한양성이 있었다. 이밖에 몽고의 침입 때 피란처로 천도하였던 강화도성과 삼별초가 진도에 세운 용장성 등이 나성의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한 왕조의 도성이었거나 또는 일시적으로 도성 역할을 하였던 곳을 제외하고 나성을 축조한 곳은 청주가 유일하다. 청주나성의 실체는 아직 명확하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고려 초기에 개경의 나성보다 먼저 축조되었다는 사실이고, 그 위치는 지금의 청주시내 중심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후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조선 후기 「청주읍성도」에 보이는 청주읍성으로 변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으로 발굴조사 등을 통하여 두고두고 풀어나가야 할 연구과제이다. <2부에서 계속>